올 겨울은 썩 춥지가 않다. 아이들이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눈 소식도 감감하다. 작년에도 그랬다. 터전을 온통 눈썰매장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던 아이들이었는데 눈이 없으니 겨울 같지도 않다. 겨울은 추워야 한다. 겨울이 꽁꽁 얼어야 해로운 곤충 알들을 다 동사시켜 다음 해 농사에 큰 병해가 줄어들기도 한다. 작년 여름 유난히 극성이었던 흰불나방 애벌레들이 올해도 얼어 죽지 않고 나타나 뽕나무 이파리들을 전부 먹어치워 버릴까 슬슬 걱정이 될 지경이다. 매년 여름 우리 아이들의 입을 까맣게 물들여주는 달큼한 오디를 올해도 먹어줘야 하는데 말이다.
겨울이 추우면 아이들도 더욱 옹골차 진다. 우리 어린이집 아이들은 웬만큼 추운 건 추운 것도 아니다. 사계절 내내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인데 차라리 뛰어놀기엔 겨울이 안성맞춤이기도 하다. 웬만한 날씨에는 겉옷도 없이 뛰어노는데 겉옷은 사실 뛰어놀기엔 굉장히 거추장스러운 옷이다. 유난히 추웠던 2년 전 겨울 이후로 아이들의 겉옷이 매우 두껍고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에 나가면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어 모두 모아놓고, 심지어 여자 아이들은 그런 겉옷을 깔아놓고 침대며, 돗자리며, 이불 삼아 역할놀이를 하기도 한다.
겨울이 뛰어놀기에 또 좋은 건 뒷산을 빼곡히 점령했던 텃밭 작물들이 모두 수확되어 놀 수 있는 땅이 훨씬 넓어지기도 해서이다. 물론, 마늘이나 양파, 봄동 같은 작물들이 남아있기는 하나, 고추를 심었던 땅이며, 고구마를 심었던 땅들이 수확을 마치고 넓은 들판이 되어 맘껏 휘젓고 다닐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겨울이 추운 줄도 모르고 내 세상처럼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겨울에 웬만해선 감기에 걸리지 않는 아이들이 된다. 잠깐 왔던 감기도 약 한 번 안 먹고 금방 쏙 들어가 버린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다. 매우 더운 여름도, 매우 추운 겨울도 모두 견디고 이겨내며 살아온 민족이다. 그래서 더운 것도, 추운 것도 이겨낼 수 있는 유전자가 우리 몸에는 존재하고 있다. 또한, 더운 날 땀을 흘리고, 추운 날 적당히 움직여 몸을 덥혀 주어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것이 우리 몸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틀거나, 조금만 추워도 보일러 온도를 높여 지나친 난방을 하는 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일뿐더러,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건강한 자연을 해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도 한민족의 유전자를 타고났는지 더워도 잘 놀고, 추워도 잘 논다. 특히나 눈이 오면 그 차가운 눈밭을 굴러다닌다. 하얀 도화지 같은 눈밭을 그냥 두지 않는다. 우선 눕고 보고, 뭉쳐 보고, 던져 보고, 미끄럼을 탄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논다. 얼굴이 벌게지는 건 추위에 볼이 얼어서이기도 하지만, 하도 뛰어놀아 더우니까 몸의 열기가 그렇게 얼굴에 붉게 피어오르는 거다. 나도 덩달아 아이들과 뛰어놀며 후끈 달아오른다. 공동육아 교사로 8년, 나도 그렇게 겨울에 아파본 적이 없다.
어쨌든 그렇게 별로 춥지 않은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들어서고 있다. 2월이 되면 바람은 코끝을 날카롭게 베어도 햇볕은 조금씩 따스해진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땅은 봄볕을 알아본다. 더러는 햇볕 따뜻한 날, 양지바른 곳 무리 지어 촘촘한 봄까지꽃(흔히 개불알풀로 알고 있는 꽃, 봄까치꽃이라고도 불리우나 봄까지꽃이 바른 말)이 반갑게 꽃잎을 활짝 펼치기도 하고, 겨우내 빨갛게 이파리를 땅에 납작 엎드려 견디던 냉이가 서서히 꽃대를 올린다. 땅 깊은 곳에 봄의 기운이 들어서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들과 냉이를 캔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땅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린 냉이를 아이들은 끈질기게 땅을 파내어 뿌리 끝을 보고야 만다. 겨울은 황폐할 것 같지만 조금만 땅과 가까이 눈을 맞추면 겨울을 이겨내는 대견한 녀석들을 꽤 많이 만난다. 지칭개며, 개망초, 쇠별꽃들이 여전히 푸른빛을 머금고 땅에 바짝 엎드려 있다. 아이들은 가끔 지칭개를 냉이라며 캐오기도 하는데, 그럴 땐 뿌리의 냄새를 맡아보게 해 준다. 냉이만큼 향긋하게 대지의 냄새를 품고 있는 아이는 없다. 다섯 살 아이들도 감탄하는 냄새다.
"이모, 너무 향기로워요."(우리 터전에서는 아이들이 교사를 보고 이모라고 부르거나 별명을 부른다.)
"음~, 먹고 싶다!"
냉이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먹고 싶어 하는 건, 냉이를 먹어 본 경험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이들과 이삼십 분을 땅을 파고 있노라면 시장에 나가 팔면 5천 원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만큼 캔다. 이렇게 캐면 터전 아이들은 맛단지(급식교사)가 맛있게 된장국이며, 냉이전이며 황홀한 냉이 음식을 냉큼 만들어줄 줄 안다. 그렇게 먹은 냉이는 아이들에게 천국의 음식이다.
아이들에게 절기라고 하면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절기를 살아본 아이들은 입춘 무렵이 되면 어렴풋이 곧 봄이 오는구나 한다. 입춘이 되어 입춘첩을 쓰기 위해 붓이며 벼루 등을 꺼내놓으니 아이들은 궁금해하며 하나, 둘 모여든다.
"이모, 뭐해요?"
"이제 봄이 오고 있으니 좋은 일만 생기라고 써서 붙여둘 거야."
"나도 쓰고 싶어요."
"뭐라고 쓰고 싶은데?"
"언니랑 사이좋게 지내게 해달라고 하고 싶어요."
아이들은 저마다 올 한 해 소망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나마 건강을 기원하거나, 소원 같은 것들은 어른스러운 축에 속한다.
"어벤저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고 싶어요."
"우리 반에 동생들이 안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나도 학교에 안 가니까!"
곧 학교에 들어갈 8살 아이들의 황당한 소원보다 차라리 동생들 소원이 낫겠다 싶어 썩 그럴듯한 것들을 골라 우리 모두의 소원 인양 한 장씩 써서 방문에 붙여주었다.
입춘첩을 붙여두었으니 올핸 나쁜 귀신 안 들어오고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