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깨우는, 경칩>
봄이 왔다.
춥고 사람 그리운 계절이 지나 진짜 봄이 오고 있다. 추운 겨울엔 사람 온기가 제법 버틸 수 있는 기운이 되어주기도 하는데, 올 겨울엔 신종 코로나란 놈이 사람 사이를 멀리 떨어트려 놓아 마음도 추운 계절이었다. 그 덕에 아이들도 바깥 외출도 못하고 살더니 이제 좀 살만한 지 시끌벅적하다. 새로운 반, 새로운 친구, 새로운 선생님이 낯설기도 하지만 터전 주변의 모든 공간이 항상 변하지 않고 그대로 함께 하고 있어서 아이들은 두려워하고 머뭇거릴 일이 없다.
텃밭을 깨우다.
봄이 되면 겨우내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잡풀들을 걷어내고 슬슬 텃밭을 깨운다. 경칩이 지나 우수가 가까워오면 첫 번째 텃밭작물인 감자를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사들 힘만으로는 텃밭을 재정비하기가 쉽지 않아 연례행사처럼 이 무렵 부모들을 모은다. 확실히 아빠들이 힘을 모으면 그냥 풀밭이었던 땅이 어느새 텃밭의 모양새를 가지게 된다. 마른풀을 뽑아 버리고, 흙을 뒤집어엎어 거름을 살짝 뿌려주면 무엇이든 심을 수 있는 땅이 된다. 감자를 심는 건 아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루 날을 잡아 함께 감자를 심는다. 나무를 때고 남은 재를 가져와 감자를 두 세 등분해서 재를 묻혀 교사가 파둔 구멍에 집어넣어 흙을 덮어주면 된다. 어려운 작업이 아니라 아이들은 서로 하고 싶어 굉장히 분주하다. 그래도 손놀림이 제법 능숙한 7살 형님들이 가장 많은 감자를 심는다. 많이 심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이거는 내가 심었으니까 내가 먹을 거예요.”
그래 봤자 감자잎이 무성해지면 어딘지 금방 잊어버릴 걸 알아 그러라고 맞장구쳐준다. 이렇게 심은 감자는 하지 무렵 아이들과 함께 캐서 반찬으로, 간식으로 식탁 위에 뿌듯이 한자리 차지할 것이다. 그때까지 아이들은 텃밭에 매일같이 들러 감자 싹이 얼마나 나왔나 지켜보고 기다린다.
미세먼지가 있어도 놀아요
텃밭에 풀도 뽑고 여린 쑥 이파리 뜯어다 쑥국도 끓여먹고 해야 하는데 몇 년 새 봄날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다. 바로 미세먼지 때문이다. 추워도, 더워도 바깥에서 노는 아이들이지만 미세먼지가 극성인 날은 차마 바깥에서 오래 놀게 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바깥놀이는 매우 중요해서 나들이를 나가지 않은 날은 교실 안이 한층 더 요란하다. 에너지 왕성한 이 아이들은 밖에서 발산을 해주어야 실내 활동이 훨씬 안정적이다.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오려고 마스크를 씌워 준다. 그러나 놀다 보면 그 마스크란 놈은 땅바닥에서 뒹굴거나 손에 들고만 있느라 누런 흙 때가 묻어있기 마련이다. 이래 저래 참으로 거추장스럽다. 그나마 터전 뒤 작은 뒷산은 미세먼지가 극성인 날에도 작은 위안을 주는 곳이다. 산소를 만드느라 작게 조성된 터(일명 사자동산 – 죽은 자를 지키는 사자가 양쪽에 돌조각으로 세워져 있다.)는 둘레에 커다란 향나무가 둥글게 촘촘히 배치되어 있어, 추운 날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나무가 든든하게 막아줘서 자주 가는데 그런 비슷한 이유로 왠지 미세먼지도 막아줄 것 같아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사자동산에서 자주 놀게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산소 옆에서의 놀이는 항상 자연스러웠지만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산소 옆에서 노는지 물어볼 때가 있다. 묘지 옆이라 조금은 께름칙해서 물어보셨을 텐데 우리 입장에서는 몇 년 동안 계속 그렇게 놀았기 때문에 그럴듯한 답변이 떠오르질 않아 살짝 당황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소풍을 가도 남의 산소 옆에서 놀았다. 산소 옆은 잔디가 깔려 있어 뛰어놀기에 매우 좋은 곳이다. 게다가 선산을 조성하기 위해 터도 매우 넓다. 산소 주인이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주며, 특히 여름 지나 풀이 아이들 키보다 더 커져서 놀지 못하다가도 추석이 지나면 다시 놀기 좋게 벌초가 되어 있어 이보다 좋은 놀이 장소가 없다. 물론 산소 주인이 마음씨 좋게 아이들이 놀아도 된다고 허락을 해주셔서 맘 놓고 놀 수 있기도 했다. 질문을 했던 부모들도 조금 살고 나면 금방 이해하시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사자동산의 천연간식
사자동산은 경칩 무렵이 되면 십자화과 꽃들이 물이 올라 꽃들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겨우내 캐던 냉이가 꽃을 피우고, 이파리로 옹송그리고 있던 갓이 노랗게 꽃대를 올린다. 교실 안 계절 테이블에 장식 삼아 꽂아놓을 노란 갓꽃을 똑똑 따내고 있으면 알싸한 냄새가 강렬하게 코를 자극한다. 어릴 적 기억으로 가끔 꽃대를 따서 껍질을 벗겨내 한입 먹고 있으면 아이들은 번개처럼 교사 옆으로 모여든다.
“나도 줘요.”
“음~, 매운데?”
“나는 하나도 안 매운데?”
어른도 맵싸한 갓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이들은 안 맵다는 거짓말을 뻔뻔하게도 잘한다. 정말로 안 매운 듯 갓꽃이 보이는 족족 잘도 분질러 먹는다. 매운 갓꽃을 못 먹겠는 아이들은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광대나물로 향한다. 광대나물엔 아주 작은 꽃대롱이 있는데 그것을 따서 먹으면 개미 똥만큼이나 한 꿀이 나온다. 온갖 자극적인 음식이 범람하는 시대에 이 아이들은 혀 끝에 살짝 느껴지는 단맛도 감사히 받아들인다. 갓의 매운맛도, 광대나물의 꿀맛도 첨가물 하나 없는 청정한 자연의 맛이다. 오늘 맛 본 순박한 사자동산의 간식이 우리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어 다음 세대에도 전해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