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를 적시는 이슬처럼 가을이 와요

이슬이 맺히는 백로

by 코알라

“따끔이 속에 반질이, 반질이 속에 털털이, 털털이 속에 냠냠이인 것은 뭐~게!”


굉장히 직관적인 수수께끼이지만 아이들은 사뭇 진지하다. 따끔이는 뭔지, 털털이는 뭔지 한참을 고민하지만 아이들 입에선 맥락 없는 답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추?”

“까마중?”


근래에 나들이 다니며 먹었던 수많은 것들이 대답 선상에 거론되지만 정답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결국 자세히 풀어서 설명을 해주니 그제야 정답이 나왔다.


“밤이야?”

“맞았어. 우리 어제 석계마을 제각 뒷산에 가서 엄청 땄잖아.”


이제 아이들은 어제 밤을 따며 있었던 일들을 경험담으로 꺼내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비 온 뒤 미끄러워진 산길에서 미끄러져 밤송이에 엉덩이를 찔린 이야기며, 주운 밤에 벌레가 먼저 찜을 해서 결국 버려야 했던 이야기, 밤을 주워서 가져왔는데 벌레가 밤을 먹고 똥을 엄청 쌌다는 이야기까지 밤 이야기에 밤을 새울 기세다. 교실 한편에는 아이들이 주워 온 밤과 밤에 들어 있던 밤나방 애벌레 한 무더기가 고이 모셔져 있다. 모든 움직이는 것이 호기심의 대상인 아이들에게 밤나방 애벌레는 오감 만족 장난감이 되었다. 움직임이 빠르지도 않고, 진행 방향에 따라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꼬물꼬물 움직이며 손으로 만지면 몸을 동그랗게 마는데 쥐며느리처럼 완벽하게 말지도 못하면서 바둥바둥거리고 있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워 한참을 들여다봐도 질리지가 않는 녀석이다. 아이들이 애벌레를 가지고 놀고 있으면 옆에서 교사는 생밤 껍질을 열심히 깐다. 이제 막 익기 시작한 생밤의 달큼한 맛을 이 아이들은 잘 알고 있어서 교사가 밤을 까주지 않으면 스스로 앞니로 열심히 까서라도 먹는 아이들이다. 밤이라는 이름이 밥에서 나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로 밥처럼 제법 든든한 음식이라 밥을 먹기 전에 먹으면 낮밥을 먹이기가 꽤 힘들다. 그래서 낮밥을 먹고 나면 후식처럼 깎아서 준다. 오도독오도독 생밤을 씹어먹는 아이들의 입이 오물오물 어찌나 귀여운지 정신을 차려보면 계속 밤을 까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살이 찌는 나들이길

백로(白露) 절기가 되면 나들이를 다니기에 제법 선선한 아침을 맞이한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이맘때 나들이를 나가면 풀잎에 이슬이 내려 모두 젖어있다. 아이들은 더러 비가 왔냐고 물어보기도 하는데 ‘지금이 백로 절기라서 그래’라고 대답해주면 뭔 말인지는 몰라도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인다. 덕분에 한참 들길을 헤치고 다니면 어느새 바짓가랑이가 척척하게 젖어 있다.

아이들이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가장 큰 이유는 까마중이다. 여름부터 아이들은 까마중의 초록 열매를 보며 어서 까맣게 익기만을 기다렸다. 어찌나 까마중을 좋아하는지 까마중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안다. 나들이길에 까마중의 위치를 기억했다가 항상 그 자리를 지나면 까매졌는지 확인하고, 아직 익지 않았으면 서운해한다. 특별히 단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맛은 토마토와 조금 비슷하지만 더 새콤하지도 않다. 들판에 흔한 풀이고, 직접 따먹을 수 있지만 공짜로 무한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라 아이들에게 특별할까. 손가락의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아 열매가 잘 터지고 손에, 옷에 범벅이 되어도 아이들은 혀가 까매질 정도로 동네 까마중을 절대 남겨두지 않는다.

그나마 까마중은 열매가 작아서 아이들이 실컷 따먹어도 걱정이 없다. 문제는 대추나무를 만날 때이다. 아이들 엄지손가락만 한 열매가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 대추를 따먹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매우 힘든 유혹을 이겨내는 것과 같다. 한두 번은 주인이 있으니 절대 따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줘서 피할 수 있지만 진짜 주인을 만나게 되면 아이들에겐 이미 축제다. 교사 입장에서는 나들이가 끝나고 낮밥을 먹어야 할 아이들이 충분히 배가 고팠으면 좋겠지만 나무 주인 입장에서는 대추를 먹는 아이들이 이쁘고 먹는 모습만 봐도 오지다. 그래서 아낌없이 대추를 따서 주신다. 배꼽인사를 수십 번을 하고 돌아가며 아이들에게 밥 먹고 먹자고 이야기는 하는데 이미 아이들 입 속엔 대추가 가득이다. 그럴 땐 ‘오늘은 조금 포기해야 하는 날이구나.’ 인정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그래도 교사의 걱정을 공감해주는 녀석들은 대추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밥 먹고 먹겠다며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백로 절기가 지나면 바야흐로 오곡백과가 풍성한 계절이 온다. 대추가 익고, 밤이 익으며 조금 더 지나면 감이 익고 곡식이 익는다. 우리가 씨를 뿌리지 않아도 그리고 애써 그들을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말미암은 자연의 본성대로 때가 되면 달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항상 즐겁게 자연과 만나고 그들을 취하지만 또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도록 이야기한다.


“이렇게 밟아버리면 다음엔 까마중을 먹을 수가 없어. 우리가 소중하게 보살펴줘야 해.”


풀 한 포기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 아이들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소중한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친구들과의 놀이 속에서도 아이들은 때때로 ‘소중하게 보살펴야 돼’를 습관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좀 더 소중하게 지켜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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