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과 대한
일 년 중 가장 추운 소한, 대한 절기가 돌아왔다. 추우면 뜨뜻한 아랫목으로 파고들어 가는 게 인지상정이나 우리 아이들에게는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본능이다. 두꺼운 옷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날이 추울수록 더욱 야생마처럼 뛰어다닌다.
눈이 오는 날
눈이 내린다. 아이들은 터전에 도착하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와~!"
아직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새하얀 마당은 아이들을 한껏 기대에 부풀게 만들었다. 아직 가방을 멘 채 교실에 들어갈 생각도 없이 그 자리에서 눈을 뭉치느라 바쁜 아이들을 간식 먹고 나와서 놀자고 겨우 설득을 시켜 교실에 들어가야 했다. 눈이 와서 얼마나 좋은지, 무슨 놀이를 할지, 썰매를 타도 되는지, 어찌나 수다를 떠는지 아침에 등원해서 하는 모든 일정은 오늘만큼은 생략해주는 착한 교사가 되어주어야 했다. 눈이 온다고 집에서 단단히 준비해서 보내준 준비물로 아이들은 열심히 무장을 하고, 엄마 아빠가 분주한 아침을 보내셨는지 오늘따라 장갑도 없이 온 아이들은 궁여지책으로 여벌로 가져온 양말을 장갑 대신 손에 끼우고 마당으로 나왔다.
눈으로 할 수 있는 놀이는 매우 무궁무진하다. 가장 먼저 아이들이 시도하는 것은 눈을 뭉치는 일이다. 아직 아무도 만지지 않은 난간 위에 쌓인 눈, 나뭇가지에 쌓인 눈, 평상 위에 소복한 눈을 몽땅 손으로 쓸고 치워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옷에, 얼굴에, 모자에 눈투성이가 되어도 마냥 즐겁고 해맑은 아이들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벌렁 누워 양팔을 펄럭여 눈밭 위에 날개 달린 천사를 만든다. 눈 때문에 옷이 젖는 것은 아이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심지어 옷의 빈틈을 헤집고 눈이 몸속을 타고 흘러 들어가도 아이들은 그저 재밌어서 깔깔거리며 웃는다. 눈을 뭉치기 시작하면 가까운 교사부터 공격하기 시작한다. 교사는 언제나 공격 1순위이다. 작은 아이들과 하면 조금 여유 있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놀 수 있는데, 어느 틈에 큰 아이들이 함께 가세하게 되면 눈 뭉칠 여유도 없이 쫓겨다니게 된다. 아이들은 이제 교사보다 더 날쌔 져서 감히 이길 수가 없다. 한쪽에서는 눈싸움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눈사람을 만드느라 굉장히 진지하다. 눈이 많이 와서 뭉칠 눈이 많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눈은 뭉쳐진다. 그것이 눈사람인지 흙사람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사실은 아이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덕분에 더욱 단단해져서 터전 지킴이로 마당 한구석을 며칠은 지켜줄 것이다.
눈이 많이 오면 가장 신나는 놀이는 역시 미끄럼 타기이다. 매일 햇살언덕을 가기 위해 오르내리던 뒷길이 미끄럼 타기에는 아주 제격이다. 눈이 자주 오던 때에는 미리 비료포대 등을 모아놓은 적도 있는데 미끄럼을 타고 놀기에는 비닐 소재가 가장 안전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료포대가 없으면 파란색 재활용 비닐이나 그마저도 없으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대형 비닐 등을 들고 와서 미끄럼 타기를 한다. 처음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은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어 주저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땐 먼저 용기를 낸 아이들이 짝꿍이 되어서 함께 타는 것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렇게 미끄럼을 타본 아이들은 위험하지 않고 매우 재밌다는 것을 경험하고 이후 몇 번 더 같이 타보고는 마침내 혼자서 타는 것을 시도해본다. 하지만 일찍 용기를 내지 않으면 그것도 몇 번 해볼 수가 없다. 미끄럼 타는 줄이 하도 길어서 점심시간 전까지 아이들은 매우 부지런히 오르락 내리락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끄럼을 여러 번 타고나면 비닐은 결국 찢어지거나 헤지기 마련인데 아이들은 썩 괘념치 않는다. 마지막에는 손은 비닐을 붙들고 있지만 사실 맨엉덩이로 비탈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교사는 제발 바지에 구멍만 나지 않길 바랄 뿐 아이도 교사도 배를 움켜잡고 웃느라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이렇게 신나게 논 날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교실에 보일러를 뜨끈하게 돌려서 몸에 따뜻한 기운을 더해 주면 낮잠 자고 일어나는 아이들을 깨우는 것이 오히려 더욱 힘들 만큼 꿀잠을 잔다.
눈 오는 날 더욱 잘 보이는 것
어느 날은 눈 쌓인 햇살 언덕을 가보기 위해 길을 나서다가 우연히 어떤 발자국을 발견했다. 움푹 파인 발자국이었는데 일렬로 늘어선 것이 분명 밤새 이 길을 지나간 짐승의 발자국이다. 아이들은 용진산에 살고 있다는 멧돼지를 백두산 호랑이 버금가도록 신비스럽게 여기는 편인데, 분명 어젯밤에 멧돼지가 왔을 거라고 한 마디씩 거든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분명 멧돼지를 만날 것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호기심에 실망을 얹어주고 싶지 않아 웃음이 나는 것을 참고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진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가니 어느덧 그 발자국이 사라져 있었고 또 다른 방도를 고민해야 했다. 이젠 길이라고는 억새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가파른 길 뿐이라 아이들은 주저 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다시 돌아 나와 다른 길을 찾으며 결국 그 가파른 길을 올랐다. 먼저 길을 발견한 아이를 따라 나란히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법 진지했다. 오늘의 나들이를 미리 예견할 수 없었던 터라 아이들의 신발은 대부분 헐렁한 운동화였고, 덕분에 아이들의 신발은 젖고 흙투성이가 되어갔다.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길 끝에 넓은 밭이 나왔고 거기엔 아이들이 찾을 수 있는 다른 발자국들이 더욱 많이 있었다. 용진산에는 멧돼지도 살지만 고라니도 살고, 꿩 같은 새들도 많다. 주변을 배회하는 길고양이나 밤마실 다니는 개들도 있다. 아이들이 찾을 수 있는 발자국들은 많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그것이 무슨 발자국인지 추측만 무성한 채 정답은 알 수가 없다. 결국 아이들은 정답이 명확한 발자국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모, 이건 무슨 발자국이에요?"
"그건 니 발자국이잖아."
"그럼 이건 무슨 발자국이에요?"
"그건 니 손가락이잖아."
폭신한 눈에 손을 꾹꾹 눌러 만들어진 모양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들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눈 찍기에 여념이 없다. 눈 찍기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은 아예 눈밭에 누워 굴러다니며 눈과 하나가 되는 '설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르기도 했다. 눈이 조금 더 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지만 시끌벅적한 오늘의 나들이가 아이들 딴에는 대단한 모험인 양 교실로 돌아와서도 후일담이 대단했다.
소한, 대한의 추위는 금방 간다. 이렇게 눈만 온다면 말이다. 어른들이야 눈이 오면 성가신 게 한 둘이 아니지만 겨울은 눈이 와야 제 맛이 아닌가. 오늘도 아이들과 오매불망 눈이 오기만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