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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Aug 08. 2021

기러기는 북쪽으로 간다


80년대 초, 일반 가정 공식 장식품이 두 개 있었다. 못난이 인형 삼형제와 원앙새 부부다.


다리 4개짜리 TV 수상기 위가 못난이 삼 형제 인형 자리다. 언니랑 따닥 따다닥 360도 돌아가는 TV 채널을 두고 다투다 지면 나는 못난이 셋 중 오른쪽 성난 놈과 얼굴이 똑같아진다. 눈은 올라가고 입은 초승달이 배 까고 벌러덩 누운 꼴이 된다.


그런 나를 보고 아빠는 도대체 누구한테 말하는 건지 "아이고 저놈 입 좀 봐라, 조조조 입! 입 내려가는 거 봐" 하고 놀린다. 그러면 언니는 왼쪽 못난이 인형처럼 눈이 포개지며 빙글빙글 웃는다. 이내 나는 가운데 못난이가 되어 울음을 터뜨린다.



앉은뱅이 자개 화장대 한켠은 알록달록한 목조 기러기 부부 자리다. 집집마다 원앙의 알록함이 다르거나, 크기가 다르지만 하나는 수컷이요, 다른 하나는 암컷이다.

원앙의 얼굴을 마주 보게 하는 집도 있고 둘을 나란히 놓는 집도 있었지만 아예 없으면 없지, 한 마리만 두는 법은 없었다.

어릴 땐 못난이 인형이었는데, 나는 이제 기러기가 될 것이다.



- 목 : 북아메리카 동부 목

- 과 : 체류기간으로 나뉘는 단기과, 중장기과, 장기 이민 고려과, 일회성 방학과 등이 있다. 그중 나는 중장기과이다.

- 종 : 나는 기러기 종이다. 기러기 이외에 독수리나 펭귄 종도 존재한다.
• 독수리 (원하는 때 아무 때나 재회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풍부한 종)
• 기러기 (학기말이나 방학 등 연 1-2회 재회하는 가장 일반적인 종)
• 펭귄 (좀처럼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날지 않는 종)

- 서식장소 : 학원 밀집지역, 전통적 한인 밀집지역, 단기간 빠른 영어 습득을 목적으로 한인이 거의 없는 외곽 도시. 중국 이민자로 인하여 교육열이 높아진 신도시, 사립학교 밀집 부촌,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높은 백인 지역 등 다양한 분포를 이룬다.


한국에서 기러기 아빠에 대해 말이 나오면 누구든 걱정한답시고 한 마디씩 한다. 고독사라든가, 사서 홀아비라든가, 외환유출, 등골 빠지는 줄도 모르고 이용당한 사례나 바람피우는 사례 등…  기러기 아빠에 대한 눈먼 동정표가 잔뜩 쌓인다.

남편은 기러기 아빠 소리가 듣기 싫어 더 깔끔하게 차리고 다니고, 잘 챙겨 먹고, 바삐 움직인다.


반면에 기러기 엄마에 대해서는 그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다. 싸구려 동정표도 가당치 않다.

기러기 엄마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끼리끼리 골프를 친다거나, 자동차 딜러와 바람이 난다거나 하는 실체 없는 소문이 흉흉하다. 일례로, 한인 커뮤니티를 잘 아는 지인이 “구설수 조심해라, 기러기로서 한인 커뮤니티에서 잘 지내려면 처신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평탄한 기러기 생활을 위한 조언이다.


기러기 엄마는 팔다리가 다 묶여 있다.

외국에 와 살지만 남편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차적 심적 경제적으로 한국에 타이트하게 메여있다. 마음이 온통 한국에 있으니 정작 거주국에 정 붙이기 쉽지 않다. 게다가 북미는 모든 학교 행사나 사교가 부부모임이다. 기러기는 환영받기 힘들다.

또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디 도움하나 받을 구석이 없으니 항상 대기조다. 기러기는 다치지도 말아야 한다. 기러기는 아파도 안된다. 아이가 잘못되면 다 욕심 많은 기러기 잘못이다. 아이 아빠가 잘못돼도 이기적인 기러기 탓이다.

있지도 않은 날개까지 꽁꽁 묶고 산다.


한참 활기 넘치는 아들들에게 아빠 역할도 해야 한다.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자전거, 스키, 썰매를 타고 눈사람을 만든다. 사진을 찍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매일 아침 아이 아빠가 혼자라는 것을 잊을 수 있도록 사진을 보내야 한다. 하루가 끝나는 시간, 한국이 아침을 시작하는 첫 통화에서 “그럼, 잘 있지. 얘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웃는 아이들 사진 몇 장을 보내기 위해서, 잘 지낸다는 힘찬 목소리와 밝은 사진을 전해주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산다.

난생처음 공도 찬다. 축구공, 배구공, 농구공.. 드론도 같이 날리고,  알지도 못하는 자동차 엔진이며 머플러, F1 얘기나 게임 얘기를 한다. 나는 자동차와 게임을 하나도 모른다. 어느날 영혼 없는 내 대답울 눈치챈 아이가 말하겠지. “엄마가 자동차 같은거 관심없는거  알아요


한 번은 몸이 아파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껴 운동을 하겠다 생각했다. 혼자 하는 것보다 모임이 있으면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겠다 싶어 운동 모임 정보를 묻고 다녔다. 기러기가 끼면 분위기 흐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가 생활도 부부모임으로 하는 외국 문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적당히 무례하고, 적당히 정중한 제지를 당했다. 무슨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종 취급을 받았다. 토종 생물의 존망을 위협하는 천적 정도로 분류되나 보다.

자의든 타의든 기러기는 기러기끼리가 제일 편하다.  그곳에서 기러기는 한국 사람이 아닌 그냥 ‘기러기’다.


이제 까지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곧 기러기가 될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이렇게 소개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 기러기 엄마예요”

아이도 기러기, 남편도 처량한 홀로 기러기다. 처음 기러기가 되려 했을 때는 분명 아이가 불쌍해서였는데, 지금 보니 아이도 불쌍하고, 남편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다. 가족이 함께이지 못하는 세월에 아이에게도 미안하고, 졸지에 기러기가 된 남편에게도 미안하고, 나에게도 미안한, 참 비효율적인 감정소비의 굴레다.


나는 못난이 인형 기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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