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아직 남아 있는 어린 나
1980년에 명동이나 광화문에서 삼성동을 가려고 택시를 타면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했다. 엄마는 늘 "에이아이디 아파트 2단지 쪽으로 가주세요" "에이아이 뭐요?" 텍시 아저씨들이 잘 몰랐다. 푸르딩딩 제3한강교 (지금 한남대교)를 건너 영동호텔 언덕 쪽까지 다다르면 "여기서 직진하다가 우회전하시고 죽 가다가, 왼쪽으로, 여기 여기서 세워주세요" 우리 집 들어가는 골목은 에이아이디 아파트 2단지 건너편, 오천 주유소 사거리 바로 전, 뉴욕제과와 상업은행 사잇길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119-1번지 32통 1반. 골목까지는 택시가 잘 안 들어갔다.
이 골목 안도 참 많이도 뛰어다녔다. 골목 바닥에 내 발자국을 다 찍어봐야지 하면서 매번 내가 안 걸었을 성 싶은 길을 골라 걷기도 했다. 이번엔 바닥에 금을 한 번도 안 밟고 집에 가 봐야지. 쉽지 않다. 아스팔트 틈 줄이 그렇게 순서대로 체계적으로 나 있지 않다. 벽에 손을 한 번도 안 때고 집까지 갈 수 있을까? 벽에 손으로 줄을 긋듯 손가락을 대고 걷는다. 손가락에 상처가 나거나 가시가 박힐 때도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대문이 담 안쪽으로 한걸음 들어가 있어서 누가 보면 내가 그 집 아이인 줄 알 것 같다. 이것도 쉽지 않다. 고개를 한 번도 안 들고 바닥만 보고 걸어도 집을 찾을 수 있나? 이건 가능하다. 발자국 수를 세면 되니까. 껌 자국만 밟고 가야지 하고 폴짝폴짝 뛰기도 한다. 그게 가능하게 하려면 가끔, 어느 지점에 껌을 뱉어 놔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삼성동 아이들은 쌍문동 아이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봉은사에서 개구리도 잡고 올챙이 채집도 하고, 아저씨 눈을 피해 선정릉 위에 뛰올라갔다 구르는게 놀이였다. 1980년 선정릉은 입장료가 없는 동네 공원이었다. 봉은사도 지금의 규모가 아니라 어른들이 쉬어가는 동네 쉼터였다. 코엑스 전시장 건물은, 실체는 있으나 쓰임이 없어 사람들이 잘 몰랐고, 테헤란로 쪽 삼성역 사거리에 소리가 컹컹 울리는 지하도는 있으나 사람도 지하철도 없던 시절이다. 탄천 쪽으로 넓게 뻗은 테헤란로 양쪽 길에 이렇다 할 건물은 하나도 없고 만국기와 내 키만 한 야리야리한 가로수만 듬성듬성 서 있더랬다. 어른들은 뭐 한다고 저 허허벌판에 테헤란로를 10차선으로 했는지 모르겠다고 쯧쯧거리셨고, 내 친구 수현이 동생 이름은 아빠가 이란 갔을 때 낳은 아이라고 이름이 이란이었다. 고이란. 갑자기 친구 동생 이름? 내 발걸음이 하나하나에 항상 이렇게 남다른 의식이 있고, 내 의식의 흐름이 남다르니 모범생 우리 언니가 내 행동반경 안에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언니도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 딱 한 번 있다. 강남으로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니 엄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정통신문에 쓰여있기를 학생을 학교의 보낼 때 머리에 핀이나 장식을 가급적이면 해 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족 회의가 소환 됐다. 언니 얘기도 들어봐야 하니까. 아침마다 엄마는 나와 언니의 머리를 양 갈래로 묶거나, 따거나, 꼬거나 핀을 꼽으며 인형 놀이를 하다 보냈다. 이것이 문제였다. 언니는 그 고운 갈색 머리가 헝클어질까 봐 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거다. 머리를 안 움직이는 국민학생이라니!! 고지식한 우리 언니, 학교에서 얌전히 있으라는 엄마 말씀을 너무 잘 지키고 있던 거다. 앉아서도 뭔가 어색하고, 복도에서도 살살 걸어 다니고, 친구가 놀자 해도 못 놀고, 체육 시간에도 에러가 나는 것이다. 예쁜 머리가 헝클어질까 봐.. 언니 머리는 며칠 뒤 아주 짧은 상고머리가 됐다. 머리핀은 다 내 거다.
인생이 내가 원하는데로 흘러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