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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Jul 13. 2021

강남 과도기

내가 아닌 나

  급식 시범학교로 선정되었다고 뙤약볕에서 신나라 손뼉을 쳤다. 박수를 치면 월요일 조회가 끝이 난다.


 매주 월요일엔 운동장 정 중앙 국기 봉을 바라보고 단상을 기준으로 한 아이가 ‘기준’을 외치면 앞으로나란히, 오른쪽 왼쪽 양팔 벌려 서서 조회를 했다. 몇 주에 한번 뒤쪽 줄에서 서 있던 아이가 쓰러져서 아~하는 탄식이라든가, 어어~ 하는 웅성거림을 들었지만, 비가 억수로 오지 않는 이상 추워도 더워도 조회는 계속됐다.


 급식 시범학교로 선정되었다고 모두 신이 났다. 이게 왜 신이 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도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 학교가 급식을 한다고 말하고 다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도 어머머 하며 탄식인지 감탄을 한 거 보면 80년 초에는 드문 일이긴 한가보다.

하지만 보리빵에 배춧국이라니. 옥수수빵에 시금치 된장국도 있었던 것 같고... 물론 밥도 있었지만 빵과 국이 대부분이었다. 참으로 창의적인 메뉴다. 아무리 시범적이라지만 어린 생각에도 참 이해 안 되는 식단이었다.


문제는 이 급식이 시작되며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무언의 계급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강남구 H동 H 초등학교는 4층 건물이었다. 1층 급식실에서부터 위층으로 뜨거운 국통과 밥통을 옮기는 일은 누가 봐도 불안했다. 한 반에 6-70명, 한 학년에 십 수 반 까지 있던 시절이라 교실과 복도는 언제나 난장이다.


학부모의 개입이 시작됐다. 학교에서 먼저 제의를 한 것인지, 학부모들이 자발적인 참여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건 학부모의 매우 공식적이고, 정기적인 학교 방문 루트가 생긴 것이다. 기이한 식단에 조금씩 익숙해질수록 누구누구의 엄마가 오늘 급식 당번이네, 누구네 엄마가 오늘 또 오시네, 누구네 엄마가 교무실에 오래 있다가 가셨네, 누구누구 엄마가 왔다 가니 교실에 뭐가 생겼네, 뭐가 바뀌었네... 뭐 이런 말들도 익숙해져 갔다.


 어느 해인가 걸스카우트 보이스카우트를 뽑는데 지원자가 많으니 누가 보아도 대략 성적으로 잘라 상위권 아이들이 뽑혔다. 걸스카우트 단원 호명 후, 도희는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고 나는 다음에 하면 되잖아~ 도희를 위로해 주었다.

다음날 도희 어머님이 왔다 가셨다는 소문이 돌았고, 도희는 며칠 후 걸스카우트 베레모와 갈색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도희는 매우 행복해했다.


 돌아가며 급식당번을 했는데 급식 당번이 되면 유난히 선생님의 심부름을 잦게 한다. 교무실에 가서 뭘 가져오라는 등의 쓸데없는 심부름을 시킨다. 쉬는 시간엔 창가 본인 책상에 불러서 하나도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

모든 답이 ‘네’인 질문들이다. 공부는 잘 되냐, 어려운 건 없냐, 부모님은 잘 계시냐...


 80년대 중반, 말도 안 되는 급식 식단에 익숙해질 즈음 나는 밖에서 노는 일도 거의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온 학교가 바빴다. 점심시간이나 체육 시간에는 매스게임 연습을 했다. 집에 와서도 매스게임에 필요한 소품이라든지 옷 따위를 손질했고 그와 더불어 피아노, 줄넘기, 주산, 웅변, 수영 등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느라 놀 시간이 없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들을 몇 달 연마하면 이 기술들로 빨리 도장 깨기를 하러 다녀야 한다. 가끔 시내에서 들어온 택시를 타면 알싸하고 메케한 냄새에 차 안에서 연신 재채기를 했다. 종로나 명동의 기류가 삼성동과 사뭇 달랐던 80년대 초였다. 좋은 시절이 지나간 건지, 내가 변한 건지, 삼성동이 다 이런 건지, 아무든 나는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나의 새로운 기술이 늘어날 때 즈음 학교에서 오래 연습시킨 매스게임이 다 필요가 없어졌다. 잠실에 어떤 다른 국민학교가 86 아시안 게임에 매스게임으로 나가기로 확정된 것이다. 분명 잠실의 국민학교가 경기장에서 더 가까워서 된걸 거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는 화동으로 출전 못 했지만 아시안 게임이 열리게 되면서 잠실과 연결되는 테헤란로는 점점 건물들이 들어섰다.

운동장 조회는 교실 안 TV 조회로 바뀌었고 삼성동 곳곳에 드문드문 있던 공터들도 크고 작은 건물들로 메워졌다.


학부모들로만 채워진 웅변대회에 나가서 ‘이지은’이 아닌 ‘이연사’를 외쳤으며 더 이상 밖에서 노는 일이 없어졌다. 나는 내가 아닌 나로 꾸역꾸역 채워지고 있었다. 매 학년 60명대로 시작하는 한 학급당 학생 수는 매 학년말이 되면 80명을 넘겼다. 한 반에, 하루 두 명씩 전학 오는 날도 있었다.


나도 변하고 삼성동도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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