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lm Apr 09. 2024

아홉 번째 : 해외이민에 대한 고민

과거에 갇힌 나를 구하기 위한 극약처방 혹은 도피

제가 정확히 제 삶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5살 후반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항공기 탑승기록을 보면 저도 기억이 안나는 탑승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 중에서 대한민국에서 보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부모님한테 여쭈어본 적이 있어요.


"엄마가 해외발령을 받았는데 아빠가 따라올 수 있는 상황이라서 같이 살았던 거고, 아빠도 해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 그래도 가족이 떨어져 본 건 거의 없지? 그런데 그 나라 안에서도 전국일주 식으로 다니다 보니 비행기를 너무 많이 탔네? 좋게 생각해. 그 비싼 시절에 비행기를 이렇게나 탔으니."



그나저나 필요 없는 내용을 조금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어린 시절을 다 보내고 나서 중학교 2학년 2학기부터 완전히 대한민국에 정착을 해서 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정착한 곳은 부모님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네가 좁아서 그런 건지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계속 붙어 다녔어요. 무엇보다도...... 저는 우리 부모님만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규칙을 잘 지키는 학생 정도(?)였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같이 학교를 다녔던 동창들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대학교나 회사처럼 동기들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여튼 같은 반이나 학년에 다녔던 학생들이나 학교에서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다 저에게 했던 말은 그대로 필터링 없이 말하면,


"부모가 그렇게 똑똑한데 자식은 병신새끼네."라고 말을 하더군요. 당시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나는 난데,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건데 왜 부모님의 분신(分身)으로 살아가야 하는 건지...... '


중학교 시절에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올라갈 때 모(某) 외고에 합격을 했음에도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했고, 그래서 중학교 때 의지했던 친구들이 많았던 일반계 고등학교에 가려고 했지만 그것도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하게 되어서 결국은 아버지 모교로 갔던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문제는 없었어요.


이제 여기에서부터 실타래가 꼬이듯 제 인생도 꼬이기 시작합니다.


일단 고등학교에 가니 그냥 나는 앉아서 그냥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저는 제 옆에 제 짝이 장애를 가진 학생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옆에 앉아있는 학생을 잘 관찰하고 문제가 있으면 알려주라고 하시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3월이 다 지나갈 때 즈음해서 또래집단의 선동으로 인해서 그 장애인 학생에 대한 괴롭힘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언어장애가 있었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특이한 것을 꼬투리를 잡아 계속 놀려대더군요. 당시에 제가 담임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럴 시간조차도 없을 만큼 정도가 심해지고, 종례시간에 제가 손을 들고 일어섰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점심시간에 A, B, C, D 학생이 제 짝을 흉내 내며 괴롭혔고 제 짝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끝났는데, "보면 아냐?"라고 하며 모멸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방금 전에 시간에 자습을 했는데도 뒤에서 A, B, C, D, E, F, G 그리고 기타 지금 제 위치에서 5시 방향에 있는 학생들이 모멸적인 발언을 하면서 제 짝의 머리채도 잡았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정상인인 제가 봐도 정상이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급해서 지금 말씀드려요."


정확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그 장애가 있던 학생의 이름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당시에 한 10명 정도 되는 일진이라고 하는 학생들이 담임선생님한테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맞는 것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폭력은 나쁘지만 어차피 경찰에 신고를 해봐야 당시 상황에 올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당시에도 있었고, 그들은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해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는 저들은 맞을 만했고, 그래도 내 짝에 대한 괴롭힘을 일시정지라도 시켰다는 것에 대해서 안도했습니다.


그다음부터 저에 대한 괴롭힘이 시작이 되더군요. 사실 저도 몸이 정상이 아니었던 상황이라 속칭 상위집단이라고 하는 '일진'이라고 하나요? 그리고 공부를 좀 한다는 사람들을 따로 모아서 수업을 하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일반 학교였는데, 저랑 말도 안 해봤고 봐보지도 않은 사람이 저를 씹고 다니더군요.


거기에 제가 가진 병(病)때문에 단체행사를 하다가 실수도 많아지고 끝까지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당시에 학교 단체행사를 준비하던 와중에 고3 선배한테 신발로 맞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한의사라고 들었는데, 침을 놓다가 신발을 안 던지는지 궁금하네요. 그 선배라는 놈의 이름도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제가 학교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저는 기억이 안 나고, 고1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난 당시에 쓰러져 있는 저에게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죽어라. 죽어라." 이렇게 외쳤다고 친구가 하더군요. 그걸 친구한테 들었고, 누가 그랬는지 그들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가방도 없어지고, 필통은 기본이고, 시계도 없어지고...... 사물함 자물쇠는 다 끊어져 있고......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을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살면서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공부는 대학교에 가서 하고, 너는 무조건 되니까 일단 고등학교 다니면서는 몸만 추스르자. 좀 쉬고 엎드려서 잠도 좀 자고 그렇게 하자. 선생님은 무조건 너를 믿을 테니까 너도 선생님을 믿어주라."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제 고3 때 담임이 기간제 교사였다가 제가 2학년 때 정규직 교사로 채용이 되고, 자꾸 저에 대해서 캐묻고 다니고, 심지어 교무실 앞에서 다른 학생하고 저에 대한 거의 악담(惡談)을 하고 있어서 친구랑 저랑 듣고는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당시에 제가 고3 담임한테 "저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니지 말아 주세요.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다 아시는 것도 아닌데 이건 좀 선을 넘으시는 것 같네요."이러자 자기는 다 안다고, 자기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의학 관련 과목을 수강했다며 제가 아픈 것에 대해서 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어차피 내 담임도 아니고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20년을 의사를 한 내 주치의도 지금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힘들어하는데 선생 고작 1년도 안 한 사람이 그리고 사범대학 나온 사람이 뭘 안다고 저렇게 까불지?'


이 이야기는 다섯 번째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https://brunch.co.kr/@f501449f453043f/10


이 문제에 대해서 바로 졸업을 하고부터 시작해서 최근까지 20년 가까이 저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선생과 그 상위집단 2개(일진, 자칭 엘리트집단)에 대해서 교육을 담당하는 부처에 민원을 수십 번 제기하고, 경찰에 신고를 해도 그들은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과거에 갇혀서 삽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나서는 누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제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 상대방이 상사던 아니던 무조건 그 자리에서 해결을 하던지 기록을 남깁니다.


그 결과 저에게 '벽창호'라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제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제가 어린 시절에 머물렀던 국가로부터 취업과 더불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다고 하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망설였습니다.


당시에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습니다. 거절을 하려고 꺼냈던 말인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씀을 하셔서 저도 많이 놀라기도 했고 고민은 한층 더 깊어지고 있었고, 지금 현재도 고민 중입니다.


일단 제가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저 하나 타국으로 넘어가서 살아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봤을 때, 부모님이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해외에서 근무를 했음에도 '차별'을 겪는 부분을 분명히 경험했기 때문에 과연 부모님과 같이 가는 게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수없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이민을 가자 아니면 가지 말자라는 부분에 대해서 기준을 정했습니다.


'이민을 가서 과거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다면 무조건 간다.'


그런데 이민을 가서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된다면 저는 그냥 버는 돈은 많겠지만 점점 삶은 병들어가고, 타국에서 자살을 할 것 같았습니다. 자살을 피하려고 이민을 간 건데 오히려 자살을 촉발시키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겠죠?


부모님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의 의지대로 해라.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거고...... 그런데 이민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면 준비는 철저히 해서 가자."


일단 지금은 이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관련한 제안을 준 쪽에서도 올해 안에는 결정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건 부모님이 저에게 말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하신 말씀을 마지막으로 적고 싶습니다.


"너의 인생을 옆에서 2년 6개월을 제외하고 그 과정을 다 봐왔고, 너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 줄 아는데,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마음속에서 수천번 아니 수만 번을 고민했다는 거고...... 무슨 선택을 하던 그리고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라도 너를 탓할 사람도 아무도 없고, 너는 엄마나 아빠처럼 치열하게 혹은 너무 곧게 살지 말고 무조건 편한 쪽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꼭 뭐를 해야 한다 혹은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고, 놀아도 너의 과정을 다 봐왔기 때문에 다 이해할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여덟 번째 : 다르면 예민하다고 몰아가는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