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을 읽고
생각의 높이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의 높이가 5층 높이라고 한다면, 일상생활을 하면서는 대부분 1,2층에 머무르고, 좀 더 높은 차원의 생각이 필요하다면 점점 높은 층으로 올라간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책들은 내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의 열거여서, "그렇지 맞아!" 하며 쉽게 읽히는 책들이 있고,
어떤 책들은 나를 5층 높이로 데리고 가서, '이런 것들이 있는 거는 알지? 근데 자주 생각 못 하지만, 있는 거는 알잖아. 그리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거가 맞아. 그리니 겁내지 말고 이렇게 해보자.'라고 나의 생각들을 견고하게 다잡아 주는 책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 책들은 5층이라고 생각해 오던 나의 세계에서 옥상으로 데리고 가서 보여준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더 있다고 말해준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 책이 그랬다. 전혀 다르게 생각하게 해 주었고, 내가 알던 많은 것들을 뒤집어 주었다. 철학과 인문학에 대해 사실 관심만 많았고, 알고는 싶지만, 내가 넘을 수 없는 벽 같다는 느낌이 항상 들어서, 읽는 걸 주저하곤 했었다. 여러 번 철학자들이 쓴 글들을 읽었지만,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좋은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 저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지",라는 생각만 하게 할 뿐이어서, 끝까지 읽은 책은 없었다. 그러다 읽게 된 이 책은, 철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철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시선을 다르게 해 주었다.
따라 하는 삶이 아닌 주체적인 삶
보통 철학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내 삶에 적용해 보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는 철학은 그 시대의 문제를 느낀 한 사람이 시대의 통념을 뒤집고, 자신의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면서 좋은 말이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철학자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시선의 높이를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지, 남들이 말해놓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는 건,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따라 하는 것일 뿐이고, 그렇게 후발주자로 남들이 해놓은 것들만을 따라가는 삶은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말한다.
중진국,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는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들을 얘기하며, 개인의 차원이기보단, 나라가 어떤 방향을 가져야 하는지 좀 더 큰 틀에서 얘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후진국에서 중진국까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한 나라 중에 하나다. 그렇기에 모범사례로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따라 하려는 운동도 많이 있다. 하지만, 중진국까지는 빠르게 왔지만, 선진국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나라를 나타내는 여러 경제지표들은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들도 많지만, 여전히 후진국적인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땜질 대처를 하는 일들이 많다. 그리고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방향을 쫓는다. 거기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경쟁에 뛰어든 모든 사람들은 거기서 살아남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렇다 보면 모든 철학을, 사회 이념을, 사상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게 되고, 나른 나라 상황과 그 시절에 맞던 것들을 억지로 맞추려고 하니 지금 현재 우리나라 문제에는 적용 가능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하는 능력의 상실이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니, 새로운 걸 만들어내지 못한다. 어쩌다 한 명 그런 사람이 나타나도, 이상하다고 모두 비난하고, 새로운 싹이 트지 못하게 밟아버린다.
개인 차원에서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건
최진석 교수는 국가라는 큰 차원에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걸 개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는 국가 차원보다 '나'라는 개인 차원에서의 혁신, 변태, 진화가 먼저 가능해야 그 이후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개인 차원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고,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보게 되었다.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많은 부분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금 현재의 사상들이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다 요즘은 특히 '내가 진짜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진짜 나다운 행동인지, 진짜 내가 원하는 행동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많은 부분에서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해서 하는 행동보다, 해야 하기에 하는 행동이 더 많았다. 해야 하는 행동들은 해야 하니 그렇다고 치지만, 내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내가 하는 것이 편하기에 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행동들은 내가 원하는 행동도 아니면서, 내가 꼭 해야 하는 행동도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걸 알게 되자, 몇 가지 행동들을 줄일 수 있었고, 눈치를 좀 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덕이 온전해지는 '나무 닭'의 경지'라고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라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투계를 좋아하던 왕이 자신의 닭을 기성자를 찾아가 훈련시켜 달라고 한다. 여러 날 계속 준비가 안되었다고 말하던 기성자가 어느 날은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고, 왕은 무슨 기준으로 준비가 되었는지 아는지를 묻는다. 그때 기성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닭이 울고 날갯짓하는 소리를 내도 꿈쩍도 안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그 모습이 나무로 만들어놓은 닭 같습니다.
이제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태연자약"이라는 말이고, "태연자약"이라는 말은 자기가 자기로만 되어 있음을 뜻한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이거나, 상대에 대한 반응으로 자기 행위가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내면에 의해서만 발동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나를 돌아보면, 나는 참 상대에 대한 반응으로 내 행동이 이루어진 부분들이 너무너무 너무나도 많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1. 해야 하니까, 2. 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착각하기에, 3. 욕먹기 싫으니까, 4. 칭찬받고 싶어서, 5. 내가 하는 것이 빨라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한 행동들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1. 재미있으니까, 2. 하고 싶으니까, 3. 좋아하니까,라는 이유로 하는 행동들은 뭔지 몇 가지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느꼈다고 하루아침에 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넓혀준 이 책을 통해서 이런 세계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알지 못하던 세계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 힘이고,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