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여자 - 박완서>를 읽고
1980년대에 쓰인 책을 2024년에 읽으니, 당연히 바뀐 시대만큼 차이를 느끼기도 했고,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정조’, ’ 미스김‘이라는 단어라던가 ‘소박맞는다’,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여자를 초반에 길들여야 한다.'등과 같이 성 차별적인 발언들로 자주 사용되어 온 언어들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2024년 현재에도 정도의 차이일 뿐 바뀌지 않은 모습들이 보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소설이었다.
딸의 결혼이라는 사건을 통해 엄마와 딸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두 세대의 여자들이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으로는 어떤 대우와 차별을 받는지, 가정이라는 그늘 안에서 어떻게 무시당하고 학대당하고 살아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똑 부러진 성격의 현대여성인 딸 연지는 직장여성이며, 결혼을 하며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가 되기보다 직장에 다니길 선택한다. 공부욕심도 있어 남편과 번갈아가면서 한 명씩 대학원을 마치기로 한다. 처음엔 남편인 철민이가 학교를 다니고 연지는 회사를 다니며 둘의 경제력을 책임지고 철민이 공부가 끝나면 교대하기로 한다. 그리고 남녀평등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가사를 책임지기로 한다. 철민에게 남녀평등에 대한 약속에 약속을 받아내 결혼을 하지만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그 시절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는 것도 낯선 풍경이었는데, 남편이 주방일을 하는 것도 부인이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철민은 점점 못마땅해한다. 거기다 연지는 임신 후 철민과 상의 없이 낙태수술을 하고 왔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철민은 연지를 구타한다.
그 일로 연지는 친정으로 들어갔지만 처음에 철민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노발대발하던 부모도 철민이 연지를 데리러 오자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을 하며 한번 실수할 수도 있다며 연지를 돌려보낸다. 그 일로 싹싹 빌어야 하는 철민은 오히려 가사에서 손을 떼고 연지가 일도 하며 가사도 도맡게 된다.
엄마인 경숙은 6년 전 교수인 남편이 자신에겐 안중에도 없고 너무 일에만 몰두하자 남편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다 젊은 여자 조교와 연구로 지방에 내려간 남편을 몰래 급습한다. 하지만 연구만 하고 있던 남편과 조교를 급습해 남편에게 타박을 받다가 이렇게 외롭겐 못살겠다며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한다. 남편은 충격에 휩싸인 듯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자식들이 결혼할 때까지 이혼을 미뤄달라 말해, 경숙은 남편이 바뀐 것 같다며 안심했다. 하지만 그 뒤로 남편은 경숙이와의 각방생활을 시작한다. 경숙은 남편의 방앞에서 울며 합방하기를 원했지만 굳게 닫힌 남편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6년이 흘렀고 이혼에 대해선 생각도 안 하던 경숙은 딸의 결혼준비로 바쁘던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자신들의 이혼날짜가 얼마 남지 않음을 상기시키는 소리에 혼란에 빠진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반응했지만 자신이 교수 부인이라는 껍질을 벗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경숙은 안절부절못하는 나날을 보내다 이혼해서 멋지게 사는 동창 들네 집에 방문하려는 계획을 짜고 홀로 여행을 떠난다.
동창 중에 이혼한 5명 중 의사를 하고 있는 박순 님을 가장 먼저 찾아간다. 하지만 박순님네서 경숙은 정리되지 않은 집에, 전혀 멋지고 당당하게 살고 있지 않은 친구를 보고 실망한다. 두 번째로 위자료를 빌딩 두 채를 받은 친구 곽은선을 찾아간다. 잘 정리정돈된 집에 가사도우미까지 있는 친구는 잘 사는 듯 보였지만 며칠 지내면서 너무 깔끔한 집에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고, 친 자식들에게 쩔쩔 메는 모습과, 결벽증적인 증상과, 유부남인듯한 남자와 하루를 보내는 모습등을 보고 실망을 한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집에 전화를 걸자 딸 연지가 친정에 와있어서 빨리 돌려보내야 하니 집에 빨리오라는 남편의 말에 체면을 차릴 기회를 잡은 듯 집으로 돌아간다.
이후 연지는 철민과 그럭저럭 지내는듯하지만 출장을 갔다 하루 일찍 돌아온 날 남편옆에 다른 여자가 누워있는 걸 목격하고 자신이 질투를 느끼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에 이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결혼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유를 모르다 남녀평등이 가능할 것 같은 철민을 남편으로 골랐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결심한다. 철민, 시댁식구는 당연하고 친정식구도 모두 연지를 비난했고, 연지가 싹싹 빌고 다시 이 결혼을 이어가야 한다고 하지만 연지는 꿋꿋이 버티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만다.
이 책이 쓰인 지 40년이 지났지만 나는 이 책에서 현재의 결혼한 많은 여자들의 삶이 보였다.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불리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제는 40년 전처럼 결혼하면 여자는 일 관두는 시대도 아니고, 회사에서 여자는 커피나 타는 신세도 아니고, 가정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육아와 가사분담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팽배해 있는 가부장적인 결혼 문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에게 많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일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연지라는 인물을 통해 박완서 작가는 40년 전에 당당한 여성,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찾는 여성을 보여줬다. 현재는 상황이 4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말도 못 하게 남녀평등이 많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지만도 못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당연했던 그 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작가의 진보적인 생각에 감탄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싫다고 말했지만 나에게 득이 되는 건 취하고 싶어 했던 내 모습과, 주체적이지 못하고 슬쩍 묻어가고 싶어 했던 모습 등등이 생각났다. 무언가가 싫고 바꾸고 싶다면 내가 취하고 있던 것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인데 바뀌어야 한다 말하며 내가 갖고 있는 건 손에 꽉 쥐고 안 보이게 감추며 내가 갖은 걸 뺏기기 싫어했다. 40년 전에도 누군가는 생각했고, 누군가는 목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행동했기에 현재만큼의 변화도 가능했을 것이다. 눈감고 귀 막고 나는 몰랐던 사실이라고 말하지 말고, 더 듣고 더 보고 더 알려고 하는 책임감은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