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태껏 눈 감고 살았을까?
저녁 9시쯤 산책이라도 좀 해야겠다 생각하며 밖으로 나섰다. 어제부터 시작됐던 편두통이 낫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약을 한번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없어지는데 오늘은 이틀째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이 약을 먹어도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조금 걷자고 생각하고 나왔다가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에 닿자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뛰기에 좋은 운동화도 옷차람도 아니었지만 나는 공원까지 뛰어갔고 공원에서도 몇 바퀴를 더 뛰었다. 뛸 때마다 지끈거리던 머리도 내가 뛰는 속도에 맞춰 더 강하게 지끈거렸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최근에 여성에 관한 소설 3권을 연달아 읽었다. 박완서의 '서 있는 여자',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여성 소설가들의 짧은 단편을 모아놓은 '현남오빠에게'. 3권을 읽으며 나는 항상 내 주변에 있었지만 눈감고 나 몰라라 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어서 한편으론 기뻤고, 한편으론 그 진실이 너무 가혹해서 힘들었다.
여러 가지 설명이 안되던 불만들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남편과 매번 싸우던 문제가 단지 성격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고, 결혼 전까진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크지 않았는데 (여전히 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하고 나면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다른 경로의 길을 가게 된다. 거기다 출산과 육아까지 하게 되면 그 폭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나라고 그 가부장제를 부정만 하면서 살았던 것도 아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거로 살림만 하면서 편하게 먹고살고 싶단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나의 삶은 점점 그런 삶과 멀어졌음에도, 직장맘으로 아이를 떼어놓고 나가야 할 때마다 그 생각이 안 나지 않았다. 아이를 떼어놓고 출근해야 하는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 부담은 나보다 항상 덜해 보였다. 그리고 둘 중에 일을 관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버는 액수에 상관없이 누가 관두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해 보였다. 그리고 설사 반대로 남편이 관두고 나만 일을 하게 된다 하면 내가 그걸 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았다.
한번 여세를 몰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에 비슷한 소설들을 검색해서 읽을 목록을 정리해서 메모장에 추가해 두었다. 더 알아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눈감아왔던 사실들에 살짝 눈을 뜨게 되며 내 온몸과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주 예전에 있었던 기억까지 모두 내 의식으로 올라와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다며 나에게 보여주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뛰면서 이제 이 생각을 그만해야겠다 하며 따라오는 생각보다 더 빨리 뛰고 싶었지만, 어느샌가 따라 잡혀 다시 여러 생각들이 내 머리를 덮쳐왔다. 이미 알게 된 사실을 가린다고 가려질 것이 아니라면 부딪쳐보는 수밖에.. 그리고 내가 여성인데 당연히 알아야 할 문제들인 거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데 너무 나 몰라라 살아왔단 생각이 든다. 내 문제 내가 의식하지 않음 누가 해준다고.
리스트에 적어둔 목록을 보며 다음 책을 골라 펼쳤다. 그래! 더 가보자! 앎으로써 일어난 지진 더 뒤집어보자. 뒤집고 뒤집어 다시 새롭게 쌓으면 되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