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나의 출산 이야기, 미국 출산(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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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다른 병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출산한 병원에서는 입원과 동시에 나는 출산을 할 병실에 계속 머물렀다. 양수가 먼저 터진 나는 유도분만제가 필요했기에 유도분만제도 그 병실에서 맞았고, 모든 검사도 그 병실에서 이루어졌다. 진통이 시작되고 아이 머리가 보이자 내가 있던 병실로 의사가 왔고, 그곳에서 출산을 하였다.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의 무게와 키를 재고 바로 내 가슴에 올려지고 나서도 아이는 계속 나와 함께 하였다. 출산 한 나는 여러 가지 치료가 아직 남아있었기에 아이는 그 시간 동안 내 옆에 놓인 자그마한 아기 바구니에 누워서 기다렸고, 모든 치료가 끝나고 내가 이틀간 입원하는 병실로 이동하기 위해 이동할 때 아이도 나와 함께 그 병실로 이동하였다. 생각보다 유도분만제가 빠르게 들어서 무통주사를 맞을 시기를 놓쳤던 나는 무통주사 없이 출산을 했었고, 무통주사를 맞지 않아서 그랬는지, 바로 걸을 수 있었다. 바로 걷는 나를 보고 간호사는 아이 바구니를 나에게 주며 "네가 밀고갈래?"라고 물어봤고, 나는 그렇겠다 하고는 바구니를 밀며 입원실로 향했다.
새벽 3시 출산에 이것저것 검사를 마치고 입원실로 이동을 하니 새벽 5시쯤이었다. 간호사는 "마실물을 줄까?"라고 물어보더니 "얼음물?"이라고 물어봤고, (출산한 달이 8월) 목이 말랐던 나는 "그래"라고 답했다. 얼음물을 받아 들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국이었으면 얼음물은 가당치도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과 엄마가 옆에 있었음 마시면 안 된다고 한소리 들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는 나에게 바로 샤워를 해도 된다고 말을 했고, 출산하느라 땀범벅이 되었었던 나는 올타쿠나 하고 바로 샤워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도 한국이었음 안 됐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시원한 물줄기를 맞으며 샤워를 했다.
출산이라는 큰 일은 끝났지만, 모유수유라는 어마어마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유수유는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저절로 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간호사들은 나에게 모유수유를 할 것인지, 혼유를 할 것인지, 분유를 먹일 것인지를 물었고, 주변에서 하도 모유수유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나는 앞으로 닥칠 일도 모른 채 모유수유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과 함께 모유수유를 어떻게 하는지 도와주시는 분이 내 병실로 오셨고, 아이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 어떻게 젖을 물려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이도 처음이라 잘 물지 못했고, 나도 처음이라 편하게 아이를 안는 법을 몰랐다.
아이를 안고 자세를 잡고, 계속 아이를 쳐다봐야 했기 때문에 내 목은 아래로 꺾일 대로 꺾여있었다. 한 시간을 수유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모유가 나오지 않은 건지, 아이는 조금 자다가 깨서는 다시 울었다. 다시 아이를 안고 자세를 잡았고, 목은 아래로 꺾였고, 한참을 안고 있다 잠드는 것 같기에 다시 내려놓으면 조금 있다가 다시 울고, 무한 반복의 늪에 빠져버렸다. 새벽출산이라 잠은 부족했고, 잠은 쏟아졌지만, 아이를 안고 잠들었다가 놓치면 어쩌나라는 생각에 눈을 부릅떴고, 그 와중에도 아이는 참 신기하면서 이뻤다. 계속 옆에 있으면서도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사진을 보내느라 바빴다. 우리의 일정상 좀 나중에 이곳으로 오기로 한 엄마와 문자를 계속 주고 받았다.
나는 나대로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하느라 바빴고, 남편은 남편대로 음식을 싸다 나르느라 바빴다. 미국병원에서는 식사로 치킨, 비프, 감자 등등 이런 음식이 나오니, 남편은 집에 가서 미역국을 끓이고 보온병에 밥과 함께 싸서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2박 3일 동안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게 병원에 있다가 퇴원을 했다. 마지막날에는 아이 샤워하는 법을 알려주기에 옆에서 꼼꼼히 보면서 어떻게 샤워할지를 보고 배웠고, 이제 집에 가서 남편과 나랑 둘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 부부는 걱정반 기대반을 하며 퇴원을 했다.
미국에서 병원에서 퇴원할 때 카시트가 없으면 아이는 퇴원을 못하기에 우리는 카시트를 가져가 아이를 카시트에 앉혔다. 제일 작은 카시트임에도 카시트는 너무나도 컸고, 아이는 벨트를 매기에도 너무 작았다. 차에다가 아이가 타고 있다는 표시를 붙이고, 조심스럽게 아이를 태우고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매일 가던 길이었지만, 그날 집으로 가던 풍경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분명 삼일 전에 병원으로 가기 위해 갔던 길이었음에도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은 시속을 줄이며 천천히 운전을 했고, 과속방지턱도 5초에 걸려서 천천히 넘으며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천천히 아이를 카시트에서 꺼내고 미리 마련해 둔 아이의 침대에 아이를 눕혔다. 아이 침대인데도 침대는 왜 이렇게 크기만 한 건지, 갓 태어난 아이가 더 작게 느껴졌다.
2명에서 3명이 되는 기적 같은 순간들을 경험하며, 내가 인간 한 명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 같았고, 세포분열을 통해서 한 명의 사람이 태어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실제로 내 눈앞에 존재했고, 움직이는 아이를 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었다. 내가 엄마라니.. 이 아이가 내 자식이라니.. 뭔가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 듯한 기분도 들었고, 여러 가지 다짐의 말들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생명탄생을 왜 위대하다고 하는지 경험해 보기 전엔 이해하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