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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빈 Nov 21. 2021

라일락에 물을 줄 때마다

슬픔을 준비하는 일


어쩜 내가 데려온 생명들은 내 배로 품지 않았음에도 동물이나 식물이나 다 나를 닮는지! 빛바랜 갈색 토분에 고집스럽게 둥지를 튼 라일락을 볼 때마다 의아한 마음이 든다. 개화시기가 다 지나버린 6월이 되어서야 올해의 첫 잎을 몽글몽글 틔우고 있는, 나의 첫 나무이며 마지막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식물. 조심스럽고 남들보다 느린 것이 꼭 중요한 일 앞에서 망설이는 나를 보는 듯해서, 몽우리만 잔뜩 매단 채 잎도 꽃도 틔우지 않는 라일락에게 “꽃 피우지 않아도 되니까, 너무 오래 망설이지 말고 잎부터 틔워봐.” 속삭이곤 했다.


 그러나 한여름 뙤약볕에 여린 잎이 다 타버릴까, 가을 찬 바람에 잎이 시들까 노심초사인 건 나뿐이었다. 누구의 재촉도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성미마저도 주인을 닮은 라일락은 남들이 다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내내 혼자 깊이 고민해 보고, 이제야 잎을 틔워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점들을 발견하면서 식물에도 정이 드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예전엔 말을 못 하니 죽어가는 지도 알 수 없을 거라 여기며 식물 키우기를 싫어했었다. 그런 내가 오일장에서 라일락을 데려온 이유는 모순되게도 곧 마주하게 될 첫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나의 강아지의 죽음. 사랑하는 존재의 첫 죽음이다. 이름은 삐삐고, 나이는 열한 살. 라일락만큼이나 주인을 쏙 빼닮았다. 스무 살까지도 사는 강아지가 많아지는 요즘, 가끔은 너무 이른 걱정인가 머쓱하다가도 검은 눈동자의 색이 뿌옇게 변하고, 산책하다 힘들어하는 타이밍이 점점 앞당겨질수록 나보다 앞서 가는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생각해 보면 오지 않은 이별을 늘 미리 준비했다. 눈치를 많이 보고 자란 덕분인지, 친구와의 우정이 틀어지기 전에도 남자 친구의 사랑이 식어갈 때도 노란 신호등을 보고 저 멀리서 속도를 줄이는 자동차처럼 혼자 눈치를 채고 관계를 멈출 준비를 하곤 했다. 지나서 돌아보니 이별이 정말 턱 밑까지 다가와서 내가 이별을 준비한 건지,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하니 저만치 있던 이별이 바삐 온 것인지 선후관계는 확실히 답할 수 없게 되었으나 차근차근 준비한 이별은 늘 걱정했던 것보다 덜 고통스러웠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라 여기며 상대방에게 내 안에 남은 모든 걸 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라일락에 물 주는 순간마다 오지 않은 삐삐의 죽음을 생각한다.


 한번 시작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나는 결국 식물장까지 고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화장 후 나오는 뼛가루를 식물 뿌리 아래 묻는 방식이다.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삐삐가 원하는 만큼씩 나를 떠날 수 있게, 그리고 내가 천천히 그 빈자리에 익숙해지는 데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줄 때 유실되면 유실되는 만큼, 잎이 되어 떨어지고 싶으면 떨어진 만큼, 꽃이 되어 향으로 날아가고 싶으면 날아간 만큼씩 떠나는 것이다. 그러다 너무 많이 떠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차 싶으면 뿌리에 흡수되어 줄기와 가지에 남아 단단한 나무로 내 곁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삶을 생각하는 일이라던 책 속 문장을 떠올리며 이틀에 한 번 화분이 축축 해지도록 물을 주고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검은 눈을 반짝이며 나만 바라보는 강아지가 내쉬는 숨이 더 귀하다. 귀찮아도 매일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 산책길에 나선다. 물웅덩이를 밟아 내딛는 걸음마다 조그만 발자국이 남고, 민들레 홀씨 냄새를 맡다가 얼굴에 잔뜩 씨앗이 붙는 걸 떼어주며 파하하 – 하고 웃는다. 라일락에 물을 줄 때마다 이 순간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나무뿌리 아래 묻히는 건 뼛가루가 아니라 달콤한 기억의 파편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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