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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ea Oct 27. 2024

아무 것도 되지 않기

2012

아침 설거지를 한다. 그릇을 차곡차곡 포개어놓고, 수건에 손을 한번 닦고 숨을 한번 푹, 내쉬니 데자뷰 비슷한 것이, 쏟아진다. 부엌은 아직 어둡다. 공기는 차갑지만 방바닥은 아직 따뜻하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 무시무시하게 바람이 나를 쪼갠다. 나가서 빨래를 걷으면서 바깥을 바라본다. 이 모든 게 다, 지금 하고 있는 행위인 동시에, 데자뷰이다.

 되돌아보니 나는 남들 어디 가고 뭐 할때 집에 있었던 날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학교를 뛰쳐나왔던 다음 날, 나는 집에서 오래오래 늦잠을 잤었다. 꿈에는 친구들의 얼굴이, 교실의 모습이 너무 생생했다. 자고 있던 그 시각 학교에 있었다면 했을 일들을 나는 꿈으로 꾸고 있었다.

문득 겨우 눈을 뜨면 공기는 무거웠다. 햇볕은 너무 밝았고, 나는 숨고 싶었다.

 전학 간 인문계 여고를 뛰쳐나왔을 때. 그때도 겨울이었다. 모든 게 냉정했다. 사람도, 날씨도. 크고 무겁고 칙칙한 회색 더플코트를 입고 혼자 고속버스터미널에 갔던 게 생각이 난다. 그냥 돌아왔다. 오면서 가출하려고 꾸었던 돈으로 동생의 그림책을 샀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집에 눌러 앉았다. 겨울의 아파트는 얼은 두부 같았다. 할머니는 항상 방 어느 구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집은 조용했다. 그리고 무거웠다.

19살, 첫 수능을 봐야 할 나이에 나는 집에 있었다. 아니, 독서실을 갔던 것 같기도 하고 혼자 비디오방엘 갔던 것 같기도 하다. 남들 재수할 나이에 첫 수능을 보고 그해 겨울보터 이듬해 봄까지 나는 굼벵이처럼 살았다. 자꾸자꾸 일드를 보고, 자꾸자꾸 이불을 파고들고, 그리고 얼은 두부를 딛고 살던 나의 맨발은 항상 파랬다. 그리고 그해의 대입에서 모조리 낙방을 하고 나는 별 기대도 없이 삼수를 했다. 시간은 그저 갈 뿐이었고 겨울은 또다시 왔었다. 또 한번 무겁고 추운 겨울을 집에서 보내고, 나는 어느 소설의 남자 주인공처럼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또다시 겨울이다.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고, 그래서 취직이란 걸 했고, 그래서 잘렸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홀로 집에 남아 식탁을 닦는다. 아직 컴컴한 식탁에 앉아 지나온 세월들에 대해 생각한다. 데자뷰다. 동어반복이다. 이쯤 되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로 도망치든, 어떻게 도망을 쳤건, 포기 했던 것들이건, 실패 했던 것들이건...간에 겨울은 항상 왔고, 대부분의 겨울을 나는 이렇게 혼자 견디어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겨울을 보낼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일까.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그 ‘무엇’ 이라는 것이 과연 내가 될 수 있는 무엇이던가. 아니다, 나는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맞다. 이렇게, 접시를 닦으며, 빨래를 걷으며 이 겨울을 날거다. 그리고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12~3년 전에 쓴 글입니다. 너무 힘든 시절에 쓴 글이라서 그냥 올리지 말까 하다가 예전과 지금의 변화를 담고 싶어서 올려두었습니다.^^

얘가 전에는 이렇게 살았구나~정도로만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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