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다.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한 척 하기 지겹다. ‘가난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니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예술가’인척 하는 거 지겹다. 부잣집에 시집간다는 친구한테 축하하는 척 하는 거 지겹다. 네일 케어 따위 쓸데없는 소비라고 매도하는 척 하기 지겹고, 대리를 단 친구에게 ‘너는 자본가에게 네 청춘과 영혼을 착취당하고 있지만 너는 너의 삶이 있으니 이해’하는 듯 한 눈빛을 보내는 거 지겹다. 요즘 들어서는 그 놈의 영혼 나도 팔아보고 싶으니까. 마시고 싶은 술 참는 거 지겹다. 다이어트도 지겹고, 열백번은 씹었는데도 집요하게 연락 오는 그 놈도 지겹다. 아침저녁으로 부모한테 사기 치는 것도 지겹고, 우리 집 구석에 위치한 내 방도 지겹고, 미련스럽게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침대도, 화장대도 커튼도, 벽지 무늬도 지겹다. 매일 같은 시각 잠드는 것도 지겹고, 눈 뜨기도 지겹다.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입속의 밥을 씹어야 한다는 것도 지겹고 징그럽다.
지금 당장 와인 바에 가서 한 칠만원짜리 와인에다가 하찮게 담겨 나오는 주전부리를 먹고 싶다.
옷 사고 싶다. 신발 사고 싶다. 옷이 없어서 대충 꿰차 입고 이상한 꼴로 나다니는 거 지겹다. 편하고 심플하게 잘빠진 옷 몇 벌과 코디가 꼭 맞는 신발 두어 켤레 정도 사고 싶다.
부스스한 머리 꼬라지로 다니는 거 지겹다. 유기견 같다. 미용실에 가서 쿨하게 23만원짜리 클리닉을 주문하며 마사지를 받고 싶다.
가방 사고 싶다. 실밥이 비어져 나오는 이 가방 말고 장인의 손으로 한땀한땀 만든 이태리제 가방 사고 싶다. 검고, 윤이 나고, 부들한 고급 가죽으로 만든 그런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단정한 힐을 신고 도도한 표정으로 또각또각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공연 보러 가고 싶다. 요즘 사는 낙은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 듣는 거 밖에 없는데 실제로 가서 좀 보고 싶다. 가서 그와 같이 뛰어도 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같은 공간 안에서 숨도 좀 쉬어보고 싶다. 그의 땀 냄새라도 맡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정받고 싶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다. 내 글이 그들의 책장에 소장하고픈 글이었으면 좋겠다. 사랑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내 글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혼자서 이렇게 꽁꽁 대는 거 외롭고 지겹다. 정말이지, 외롭다. 절절이 외롭다.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상태에서 한 계단 더 발전할 수 있게, 나를 바라봐주고 선문답 같은 대화로 뇌를 흔들어 주는, 존경할 만한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러하다.
내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님과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도, 너무 외롭지 않을 거리에
있으면 좋겠다.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고, 조용한 카페가 있고, 산책로가 있고, 햇볕이 잘 드는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식물이 가깝게 있었으면 좋겠고, 비오면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런 집이면 좋겠다.
내 주변에 음악가와 시크한 평론가와 영화학도가 있으면 좋겠다. 읽은 책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내 생각은 이렇네 네 생각은 틀리네 하면서 입씨름도 벌여 보고 싶다. 주말이면 우르르 몰려가 함께 공연을 보고, 밤에는 분위기 좋은 집에서 한잔씩 걸치고 각자 집으로 헤어질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빨리. 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을까? 도서관은 춥고, 내 방은 더 춥고, 마음은 오한이 들게 얼어 가는데 잘 날 수 있을까? 외롭다. 춥다. 따뜻한, 어떤 것이 필요해.
<12~3년 전에 쓴 글입니다. 너무 힘든 시절에 쓴 글이라서 그냥 올리지 말까 하다가 예전과 지금의 변화를 담고 싶어서 올려두었습니다.^^
얘가 전에는 이렇게 살았구나~정도로만 봐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