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관계성에 두려움을 갖게 되는 이유는 부정적인 경험들이 반복적으로 누적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나쁜 남자, 나쁜 여자, 혹은 가혹한 연애에 자꾸 놓인다면 균형과 조화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실 앞서 설명한 영혼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뛰어넘는다'란 테마로 보자면, 그런 극단적인 경험들도 다 의미 있는 경험인 것도 맞다. 문제는 내가 그런 상황밖에 창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1. 극단적인 경험 자체에 대한 집착-빠른 성장에 대한 집착일지도
저런 굴레에서는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흔히 그런 극단적이고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영혼 자체에서는 '성장'에 대한 집착 자체로 그 극단적인 경험만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자신의 두려움의 지점이 있다면, 그것을 뛰어넘으면 되는 것이지 그저 극단적인 경험들을 마구잡이로 창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오롯이 자신의 지혜와 경험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극단성은 강화될수록 반대쪽의 강한 반동도 낳기 때문에 그런 극단성도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혹시 성장 자체에 대한 집착이 있어서 그저 불나방 같은 경험들만 계속 창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다고 판단된다면, 자신이 삶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 전반적으로
'균형과 조화'라는 관점에서 재점검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는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줄여주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점차적으로 쌓아나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균형과 조화의 관점을 가져가는 것 자체로 지혜를 찾아간다는 의미도 된다.
균형과 조화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란 탄식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균형과 조화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때로 자신이 회색분자 같기도, 하고 때로는 계속 애매한 선택을 내리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고민 자체가 의미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시대의 지혜는 이쪽이나 저쪽, 양쪽 중 하나에 있지는 않다. 양쪽을 모두 아우르는 '한 차원'높은 곳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갈 수 있다. 다른 말로는 융합의 지혜? 융합의 힘, 품는 힘 정도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2. 나는 왜 퍼주는 연애만 할까 -주고받음의 균형 찾기
관계에 있어서 모두가 평등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평등하게 , 네가 하나 주었으니 내가 하나 주고받는 관계도 있겠지만, 연인이나 부부간에도 누군가 누군가를 더 품는 관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연인이나 부부간에도 누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알려 주고, 키워가야 가는 포지션에 놓일 수 있다. 영혼적으로 보면 인간적으로 나이가 더 많더라도 훨씬 어린 영혼일 수도 있고, 설령 나이가 적더라도 큰 영혼이거나 경험이 많은 영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혼적인 관계는 차치하고, 문제는 '주고받기의 균형이 깨졌을 때', 그러니까 장기간 한쪽의 일방적인 주거나 받기로 균형감이 사라졌을 때 발생하는 경우가 크다. 사실 대부분 억울한 것은 '주는 쪽'일 수 있다. 주기만 하는 것은 그 영혼의 태생적인, 특징적인 성향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자꾸 억울한 상황에 처하면서
'나도 이제 좀 받아보고 싶다'외치고는 있지만, 그 외침이 아직 영혼에게까지는 닿지 않았을 수 있다.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영혼 자체의, 또 인간 자체의 뿌리 깊은 신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는 것이 사랑이다'가 내 신념으로 자리 잡은 존재라면 그것을 깨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성장이 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 '준다'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가르침과 더불어 마치 절대선에 가까운 아주 강력한 신념이 되었다. 그렇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부어봤자 차오르지 않는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주는 영혼에게는 장기적으로는 심각한 에너지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주기만 하는 영혼은 끝없이 주기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주고 또 주어도 무언가 주고 있다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오히려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기까지 한다. 반면 받기만 하는 쪽도 뭔가 악의가 있어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영혼의 성향이 그런 것이다. 그런 영혼은 자기가 뭔가 받았다고도 생각을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존재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했듯 영혼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우리는 습과 관성에 생각보다 약하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는 주고받음의 균형을 찾아가고 싶다'선언하면 그에 맞는 일들이 자연스레 창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연애나 관계 안에서의 여러 문제들 역시, '내가 그동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맞다'생각했던 틀을 한번 깨 보면 의외로 큰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잘 줄 줄도, 잘 받을 줄도 알면
사실 너무 주기만 하는 것도, 너무 받기만 하는 것도 반동이 생긴다. 우리는 한참 퍼주고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뭔가 '베푼다'에 대해서 선하다, 착하다란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에너지적으로만 볼 때는 주기만 하고 주고받지를 못하는 것도 카르마일 수 있다. 결국 반동을 만들기 때문이다. 퍼주고 억울해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에너지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일 수도 있다. 주기만 하는 사람에서, 잘 받는 사람이 되어 보면서 에너지가 일정 수준 이상 꺾이지 않고 쌓아가며 성장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잘 주는 사람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도'계속해서 주는 때다. 그로 인한 역풍을 자신이 맞게 되거나, 상대방에도 불필요한 의존성을 만들 수도 있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칼 같은 계산은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관계
우리가 주고받음의 균형에서 데어 보게 되면 조금은 계산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계산 자체가 어려운 사람이라면 분명하게 에너지를 분배하고 쓰는 연습이 본인에게도 큰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1대 1 대응일 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 내가 확 져줄 때도 있고, 내가 상대에게 도움을 받을 때도 있는 거다.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 '주고받음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추어지고 있는지 인 것 같다. 그것이 물질적인 주고받음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주고받음까지 모두 다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는 주고받음의 균형을 맞추고 싶은 걸까, 아니면 주지도 받지도 않고 있는 걸까
사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다 관계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고려하고 생각해 봐야 된다. 특히 주고받음의 '균형'을 생각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많은 것들을 고민해봐야 하고,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도 안 해보던 짓을 해야 하는 용기를 내야 할 때도 있다. 어찌 보면 그래서 관계는 피곤하고 귀찮은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관계란 것은 재미있다.
이런 고도의 정신활동이 힘들어서, 우리는 '주지도 받지도 않는'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 그렇게 살아봐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그 어떤 교류 없이 혼자 에너지를 회복해봐야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 상태가 오래 고착되면 홀로 고인 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지점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