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데 끌리는 이유
연애나 관계 문제에 있어서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세상에 대해서 분노를 가지는 사람도 있겠지만,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특히 그 쓰디 쓴 경험을 영혼이 원해서 한 것이라면, 그를 통해서 자신이 불균형된 지점이 어디인지를 파악해갔을거다. '불균형된'지점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신이 이전 연애에서 실패를 맛보았던 것을 기존의 선/악, 혹은 사회 통념 안에서만 보면 당신은 오히려 그 안에 갇혀서 당신이 나아갈 새로운 지점에 대해서 발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가 이 모든 여정을 가는 것은 영혼이,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부분을 뛰어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사실상 영혼들이 뛰어넘고자 하는 가장 큰 부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분법이다.
옛말에 처녀가 애를 가져도 이유가 있다고 했다. 사연 없는 무덤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선/악 기준에서만 자신을 판단하게 되면 그 관념 안에서는 평생 죄인일 수 밖에 없는 분들도 있을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속박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전 연애로부터 '잘못된'지점 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불균형의 지점, 극단성을 띄고 있는 지점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물론 자신의 극단성으로부터 파생된 많은 에너지적 파장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이제부터 그렇게 안해야지'하고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참더라도 '이게 잘못된 행동이니 하지말아야지'하고 무작정 억누르는 것과, '내 영혼이,혹은 자아가 이러이러한 특징이 있어서 이런극단이 있고, 그 반동으로 이런이런 파장이 발생할 수 있다'라고 이해를 하고 행동을 절제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무조건적인 억압 또한 반동을 낳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모든 면에서 균형과 조화, 더 크게는 우리 자신의 속박을 벗어던진 자유로 향하는 것이 연애이든,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든 새로움으로 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상대 탓도 해 보고, 나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자기자신을 갈고 닦고, 이제는 새 연애를 해 보겠어! 라고 심기일전 하고 노력하는 경우들이 있을것이다. 근데 상대도 꽤 괜찮고, 서로 어느정도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관계가 생각보다 진전이 안 되는 때가 있다. 왜 그럴까?
앞서 영혼의 시야는 인간보다 훨씬 크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영혼이 자신의 속박을 풀고 자유로운 쪽으로 경험치를 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찌보면 영혼이 바라는 짝과, 인간적인 시야로 바라보는 '좋은 짝'의 기준은 매우 다를 수가 있다.그것은 영혼이 무엇을 얼마나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성격이 두루두루 맞고, 양쪽 집안도 엇비슷하게 기우는 곳이 없고, 심지어 서로 호감도 있는, 그야말로 인간적으로는 모든게 갖추어진 상태인데, 외려 결혼을 안하는게 이상할정도인데 어긋나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들은 영혼적으로 원하는 바가 다르기에 그렇다.만약 이 두 영혼이, '아 이번생은 큰 노력 안하고 알콩달콩 나랑 잘 맞는 사람 만나서 즐겁게 놀다가 가보고 싶어'하는 계획을 한 영혼이라면 무리없이 결혼까지 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둘 중 한 영혼이 '나는 저번 생에서는 어느정도 내 원래 상태에서 행복한 것들은 충분히 해봤거든, 그니까 이번 생은 좀 내가 고질적으로 갖고 있던 부분을 깨 나가고 자유로움으로 향하게끔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라고 한다면, 사실 인간적으로는 외려 서로 불편한 지점, 부딪힐만한 지점이 있는 듯 보이는 사람과 이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있다.그것들을 서로 수용하고, 그 와중에 조화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아보는 것이 그 영혼들이 획득하고 싶은 지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왜 연애를 할 때 '뭔가 싫은데 자꾸 생각난다' '가까이 가면 다칠 걸 알지만 한번 가보고 싶다'하는 요상한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있다. 내가 '불편하다'느끼는 모든 부분이 사실 어찌 보면 내가 가진 경계와 한계의 지점이기도 하다. 영혼이 그 부분에 대한 자유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현재 편안해하는 지점을 모조리 깨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싫기만 한 사람, 별 희한한 사람만 수집하듯이 만날 필요도 없다.그건 또다른 집착이고 극단일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인간적으로, 정말 최대한으로 상대방에게 호감이 가게끔, 나의 마음이 전달되게끔 노력을 했는데도 잘 안되는 경우는 상당히 억울할 것 같다.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이런게 호감의 표현이다'라고 할 법한 행동들만 골라서 했는데, 상대가 딱히 나에게 싫은 감정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멀어지는 것 같다면 말이다.
이런 행위를 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자체로 엄청나게 큰 변화이다. 그러나 행위에 먼저 앞서는 것은 자기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에너지를 바꿔나가는 노력이다. 생각을 먼저 바꾼 다음 행위로 표현해봐야 힘이 실린다.
내 의식의 근간은 그대로인데, 행위만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크게 없다.
마치 티눈 같은 거다. 두텁게 굳은살로 덮인 티눈의 각질을 거의 다 없앴는데, 그 뿌리가 제거되지 않으면 또 다시 그 자리에 티눈이 돋아나는 것 처럼 말이다.
내가 인간적으로 모든 노력을 해 보았는데, 별 개선점이 없는 경우는 사실 자신이 내면에 관계에 대한 두려움, 상대에 대한 경계나 철벽 같은 것들을 여전히 갖고 있을때 발생할 수 있다. 나는 하노라고 하였는데, '상대방과 잘해보고 싶으니 이렇게 해 봐야지'하는 행동마저 깊이 들여다보면 상대방을 밀쳐내고있는 에너지일수 있다는 것이다. 내면에, 영혼에 그런 에너지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영혼의 에너지는 인간의 의식보다 아주아주 훨씬 크다.그래서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우리의 습의 뿌리가 훨씬 더 깊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카르마가 그만큼 크다'하고 실망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보았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어서 무력감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 내가 뛰어넘고 싶은 부분의 뿌리가 내 인식보다 훨씬 더 깊었구나'하고 한번 더 자신을 인식했을때 좀더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물론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대체 어디까지 나의 철벽은 있는 것인가'하고 되려 큰 절망을 했을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거기서부터 다시 길을 잡아나갈 수 있어서 적어도 막막하지는 않았다. 더 깊이 자신을 인식하고 더 깊은 수준에서 나의 경계를 깨나간다면 분명히 변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