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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ea Nov 12. 2024

안정된 연애를 하고 싶은데 자꾸 딴 데 눈이 돌아간다면

 연애를 하고 있는 중에도 자꾸 딴 데 눈이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그런 경향이 심한 사람들을 우리는 바람둥이라고 부른다. 사실 바람을 자주 피우는 분들 중에는 아주 즐겁게 자신의 바람을 즐기는 경우도 있지만 자괴감을 자꾸만 느끼면서도 그것을 멈추지 못하는 경우도 꽤 많은 것 같다. 혹은 바람 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의 연애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새 사람을 찾아다니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앞선 글에서는 주로 연애에 대한 상처 때문에, 혹은 없는 이유로 연애 자체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이 다루었지만 오늘 시간에는 관계성을 놓지도 못하면서도, 자꾸 눈이 돌아가는 분들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가장 큰 지혜와 진리를 찾아간다는 것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보면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고 그 여정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지혜를 깨닫고, 또 진정 원하는 것을 향해 다가간다. 사실 우리 모든 영혼 각각이 '연금술사'의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주를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지혜를 깨달아가는 우리의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아집을 깨기 위해서 여정을 떠난 탁발승(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며 수행을 이어나가는 승려)과 같은 느낌도 받는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사실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나 지혜를 책에서 얻을 수도 있지만, 가장 크게 체험으로서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존재는 사람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내 옆의 짝을 갈구하는 것은, 책이나 강의로 배울 수 없는, '나만의 어떤 것'을 함께 봐 나가고, 거울처럼 비춰주고, 때론 보완도 해 주면서 자신의 내밀한 부분까지 직접적으로, 긴밀하게 함께 교정해 나갈 수 있는 상대역을 찾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연애가 그렇게 버라이어티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연애를 하는 것도 지혜나 진리를 갈구하는 우리의 대표적인 모습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자꾸 딴 데 눈이 돌아가고, 자꾸만 새 사람을 찾는 것도 어찌 보면 새로운 에너지나 더 높은 진리에 대한 탐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들도 결핍감이 있다

흔히 바람둥이들을 보고 '결핍이 심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더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다. 진리적으로 보면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계속해서 갈구하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그저 이 행성을 여행했다가, 저 행성을 여행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앞선 글에서 계속해서 말해왔던 '절대적 사랑에 대한 고정된 상'이 강할 경우에도 자꾸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자신이 기억하는 온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이 있는데, 자신은 그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현재 만나는 사람은 그 절대적인 사랑과 일치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다.


 낮은 자존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찾는 것이나, '내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나, 공통적으로는 낮은 자존감에서 기인했을 수 있고, 또 낮은 자존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

 사실 영혼들이 여정을 떠난 것은, 예를 들면 쌍둥이불꽃이 분리됨을 통해서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고자 한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이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틀을 깨기 위한 여러 가지 경험들, 때로는 거친 삶의 경험들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여정을 지속하다 보면 어떤 굴레에 빠지게 된다.


'좀 더 깨달으면, 좀 더 높은 차원의 지혜를 얻으면
나는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언제부터인가 삶이 끝없는 수행과 그에 따르는
고행 같은 삶들로만 점철되어 있네?'


 그러니까, 깨달음 그 자체나 자기 자신을 갈고닦는 것에 집착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맹목적으로 서울대롤 가려는, 최고의 직장을 가려는 사람들의 심리와도 같다. 거기까지 올라가 보면 뭔가 내가 추구했던 절대적인 행복이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인 것이다. 영혼들도 똑같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는 자신이 매우 세속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있고, 저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되짚어보면 '더 높은 것'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는 굉장히 보편적인 현상이다. 영혼의 방향이 인간의 삶에 반영이 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있어도 끊임없이 딴 눈을 파는 사람들이 자꾸만 자기 옆의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더 높은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고 나는 거기를 향해 달려 나가야 한다.'는 것은 성장을 추구하는 영혼들이 가질 수 있는 대표적인 집착일 수 있다.

  물론 나보다 뛰어난 것은 이 우주에 항상 있다. 그러나 함정은 이 우주는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당신은 단지 당신의 여정을,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끝을 쫓아가는데 쓰고 싶은가? 아니면 당신 자신으로서의 빛을 좀 더 키워가면서 나름의 존재성을 발휘하면서 행복을 찾아가고 싶은가?

 대부분은 '저는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고 싶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주의 끝을 쫓아가고 싶은, 가랑이가 찢어지는 기분으로 사는 사람도 엄청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대한민국에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 앞에 우리 자신의 빛을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우주의 끝에 도달해보고 싶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문제는 차치하고 내가 그것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는지는 살펴봐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어' '우주에 비하면 나는 하찮아'하는 생각이 내 시선을 자꾸 외부로 돌리고 더 좋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갈망하게 만든다. 당신들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당신 영혼의 반쪽과의 이별은, 한 몸과도 같았던 당신 영혼의 반쪽과의 분리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어'라는 생각 자체에서 기인했을 수 있다. 정말로, 당신들의 전부이자 세상이었던 상대방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어'라는 생각으로 분리되고, 날아가버리는 현실을 창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우주를 여행하면서 세상의 온갖 진귀한 것들을 긁어모아도, 그것들을 '나'라는 실로 꿰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단편적인 파편에 불과하다. 마치 명품 리미티드 에디션을 애써 사서 모아두었는데 옷장 안에 모셔두고 입지도 팔지도 않는 것과 같다. 자신만의 안목으로 그것을 코디해서 입어봐야 된다. 그 안목이  촌스럽든 아름답든 간에.

낮은 자존감과 결핍감의 문제는 사실 외부의 그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도 회복이 잘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 끊임없이 바꿔나가야 할 문제다. 내가 어떤 외부적인 이유나, 영혼적인 경험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졌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내가 별게 아니다, 나는 하찮다'라는 나의 에너지로부터 자존감이 낮아지는 모든 일이 창조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는 나의 삶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낮은 자존감의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일 수 있다. 그 원인을 생각하면 끝도 없이 뱅뱅 돈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광활한 우주 앞에, 그 절대성 앞에 우리가 쫄 수도 있는 것이다. 졸리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그 높은 선인들의 경지를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에 우리는 때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우리의 출발점을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의 여정을, 우리 스스로의 굴레로부터의 자유를 벗어나서 더 행복하기 위해 선택했다. 우리는 단지 더 높은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로 인해서 나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한 빛을 스스로 퇴색하고 있는 건 아닐까? 더 좋고, 더 높은 것을 찾아 헤매며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결국 연애란 것은 나 자신과 가장 밀접한 주변을 어떻게 창조하고 있는지 투영하는 것

 연애는 그 어떤 관계성보다도 가장 나 자신의 심연의 모습이 잘 드러나게 되는 관계의 형태이다. 왜냐하면 어디 묻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음치인데 합창을 하게 된다면 그냥 대충 립싱크만 해도 내 노래실력이 탄로 나지 않은 채로 묻어갈 수가 있다. 그런데 단둘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심지어 화음도 넣어야 한다면? 내 노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회생활이나 단체생활에서는 굉장히 뛰어난 사람도 막상 연애문제에 있어서는 바보 같아지는 사람들은 그런 경우다. 당신이 사회생활이나 단체생활을 잘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영혼 깊은, 심부의 모습은 연애나 가족 관계, 혹은 그에 상응하는 밀접한 관계성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관계성 안에서 내가 끊임없이 외부로 시선이 가는 것은 이유가 엄청 다양할 수 있을 거다. 상대가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서일 수도 있고, 내가 연애에 집중 못할 환경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패턴 안에서 그 어떤 선택도 온전히 내리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받고 있다면, 지나치게 비대해진 자아의 부분은 걷어내고,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아도 좋을 것 같다. 당신은 당신만의 고유한 빛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잠시 묻어두었던 그것을 이제는 다시 꺼내 볼 때일지도 모른다.


셀프체크

나는 스스로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이 삶을 살고 있는가?

그를 통해 더 행복해졌는가?

맹목적으로 ' 더 높은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빛의 색은 무엇일까? 도화지가 있다면 자유롭게 그림으로 표현해 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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