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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less Jun 23. 2022

이모님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시절의 우리들은 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었는지, 일주일에 칠일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당시 우리는 돈이 없었다.
요즘처럼 대학생이라고 집에서 넉넉한 용돈을 주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집회 현장과 학교, 그리고 술집에서 쓰기에도 우리의 시간은 늘 부족하다 보니, 아르바이트란 꿈같은 얘기였다. 생각해보면, 정말 오가는 데 필요한 차비 외에는 가지고 다녀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희생양은 언제나 선배들이었다. 우리는 강의가 끝날 무렵 정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선배들에게 "선배님, 술 사주세요." "술 마시고 싶어요." 외치기 일쑤였고, 선배들은 처음 얼마간 흔쾌한 표정으로 술을 사주곤 했었다. 신입생인 우리가 보기에 선배들은 왠지 돈이 많아 보였고, 신입생으로서의 특권을 남용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선배들은 술통인 우리들을 피하기 시작했고 (선배라고 해봐야 사실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선배들 역시 우리에게 술을 사주고는 집에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나 역시 선배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작전을 변경했다. "선배님, 백원만 주세요." "선배님, 오 백원만요."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는 액수지만, 당시 이 천원이면 학교 앞 술집에서 네 명이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액수였다. 우린 그 돈으로 밤새 술을 마시고, 마르크스를 이야기하고, 트로츠키에 열광하고, 노동가를 부르며 목이 터져라 정권 타도를 외쳤었다. 


당시 학교 앞에는 학과별로 단골 술집이 있었다. 어느 과는 어디, 어느 정파는 어디, 이런 식으로 단골 술집들이 있어서, 우리들은 '이모님'이라 부르며 술집을 드나들고는 했었다. 우리 과의 단골 술집은 삼룡이네, 뒤뜰, 부부식당 이렇게 세 군데였다. 삼룡이네는 곱창 순대 볶음, 뒤뜰은 소라무침과 순두부, 그리고 냉면, 부부식당은 부대찌개와 김치볶음밥이 최고였었다. 지금 어느 이름난 곳에 간다 해도 그 맛보다 나은 곳이 있을까! 하지만, 정작 우리를 사로잡은 것은 이모님들이었다. 


95년, 학생운동이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을 때, 학교 앞은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우린 거의 매일 수백 개의 화염병을 만들어 던지며 세상을 바꾸자고 피를 토했었다. 화염병의 재료가 되는 소주병, 그걸 구하기 위해 후배녀석들은 빈 병 수거 작전에 들어갔었는데, 한 두 시간쯤 지나서였을까, 시뻘개진 눈으로 빈 병이 담긴 종이 상자를 들고 온 녀석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냐, 무슨 일 있었냐는 질문에 녀석들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학교 앞을 돌아다니며 빈 병을 주십사 부탁을 해도, 대부분의 술집들에서는 문전박대를 하더란다. 데모하는 데 쓸 거 아니냐. 그런 짓이나 하라고 너희 부모님들이 대학 보낸 줄 아냐. 평소에 단골은 아니어도 낯이 익은 학생들을 데모나 하는 문제학생 취급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뒤뜰에 갔는데, 이모님께 사정을 말씀 드리니 구석에 쌓여있던 종이 상자를 꺼내오셔서는 신문지를 깔고, 소주병을 담아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더란다. "니들 뭘 하려는지 잘 안다. 하지만, 좋은 세상도 살아서 봐야지, 죽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거다. 니들 선배 귀정이도 내 손으로 보냈다. 니들은 죽어서도 다쳐서도 안 된다. 꼭 건강하게 잘 살아서 좋은 세상 같이 보자. 그게 내 소원이다." 후배 녀석들은 이모님이 소주병을 싸주시는 걸 보며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우리들도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이모님. 꼭 살아서, 건강하게 살아서, 좋은 세상 만들게요. 고맙습니다. 


그 해 겨울,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나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이야 들었다고는 해도, 소위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내가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지도교수님은 내 진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셨고, 시간을 쪼개 공부에 매달려도 합격은 어딘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운 좋게도 나는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입학시험을 치르고 당당하게 합격한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우린 삼룡이네에 모여들었다. 동기들, 선후배들과의 조촐한 축하 자리였다. 이모님께서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는지 궁금해하셨고, 후배녀석은 반쯤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말씀을 드렸다. 공부와는 담쌓은 선배가, 데모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 같던 선배가 대학원에 합격했다니, 그 녀석도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이모님은 말씀을 들으시더니, 냉장고에 가셔서는 소주 한 병을 들고 오셨다. 이 소주는 이모님이 살 테니 한잔 받으라며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고맙다고. 잘 되어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보이시다가, 웃음 지으시다가, 내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는 말씀을 되풀이하셨다. 그건 어쩌면, 어머니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나는 결국 이모님께 안겨서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이던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삼룡이네 이모님을 뵈었다. 가게를 그만두고, 쉬고 계신다고 하셨다. 벌써 10년 전의 그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여전한 모습으로 내 손을 붙잡고 이것 저것 물어오셨다. 어떻게 지내왔냐, 결혼은 했냐, 건강하냐, 일은 잘 되냐. 순식간에 10년의 시간은 사라져버리고, 난 그때처럼 이모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따뜻했다. 따뜻한 손이었다.


봄이 더 완연해지면, 5월이 가기 전에 꼭 한번 보자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흔한 핑계로 생활을 살아가며 그 시간들은 지나가고 말았다. 가끔은 그 약속을 떠올린다. 그때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것, 그때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그 시간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만든 그 시간들이 종종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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