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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less Apr 22. 2021

만달레이 가는 버스

미얀마 여행은 어느새 일주일을 넘기고 있었다. 바간을 떠나는 날, 아침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데 입안에서 피가 한 덩어리 나왔다. 헐. 나 어디 아픈가? 거울을 들여다보니 잇몸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이게 뭔 일인가 들여다보니, 호텔에서 준 억센 칫솔로 대충 문지르다가 잇몸이 여기저기 터진 거였다. 우와 위험한 칫솔이네. 덕분에 커피도 못마시고 택시를 불렀다.

터미널로 가주세요. 낡은 토요타 크라운은 일종의 자가용 택시인 것 같았다. 창밖으로 어느새 익숙해진 동네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역시나 그리워하겠군.

애초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터미널에 도착했다. 바간에 도착하던 날 곧장 숙소로 간 탓에 떠나기 전 돌아보려는 것이었는데, 정작 터미널에는 볼 것도 할 것도 없었다. 호텔에서 아침까지 먹은 터라 식당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일단 티켓오피스(로 보이는 곳)에 바우처를 들고 갔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바우처도 보지 않고 기다리라고 했다. 나 심심하단 말야. 잡담이라도 나누면 안될까? 말을 건네려니 등을 돌리고는 자기들끼리의 대화로 돌아갔다. 별 수 없이 터미널 구경에 나섰다.

미얀마인들이 애용하는 트럭버스(?)도 가까이서 보고

앞뒤로 앉을 수 있게 개조된 사이드카도 구경하다가 수동식(!) 개폐기를 발견했다.

터미널 출구에서 담당자가 티켓? 출입증?을 확인하고는 수동식(!) 개폐기를 여닫고 있었다. 줄을 당겨 바를 올리고 내리는 장면이 재미있어서 "우와, 우와"를 남발했더니 담당자가 게면적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해보면 안될까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참고 돌아섰다.

도착한 날은 못봤는데, 터미널 입구에는 '적정 요금표'라는 것이 크게 붙어있었다. 바가지 요금을 막기 위한 것이겠다. 자세히 보니, 뉴바간까지 우리돈으로 8천원이었다. 헐, 첫날 무려 2천원이나 바가지를 쓴 거였다. 아이 억울해. 서러운 마음에 어디 하소연할 곳은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금발 젊은이 하나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왔다. 

혹시 바간에 가니? 우리 택시 셰어할래? 와, 너 나보다 영어 더 못하는구나. 너 어디서 왔어? 물어보려다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참았다. 대신, 난 벌써 삼일째고 이제 만달레이로 간단다. 행운을 빌어주지. 시크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실망한 표정의 젊은이에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지만 여전히 할 일이 없었다. 아, 금발 젊은이하고 재패니스 퀄리티 바지 얘기라도 할까, 갈등하는데 저쪽에서 티켓오피스에서 본 직원이 손을 흔들었다.

직원이 가리킨 곳을 보니 미니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뭐야, 이걸 타고 가는거야? 커다란 에어컨 버스가 아니었어? 어쨌든 출발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버스에 오르고 보니, 버스에는 나와 양파 포대 뿐이었다. 헐. 내 여행 동반자가 양파야? 기사에게 농담을 건넸더니 썰렁한 표정이 돌아왔다. 나 심심하단말야. 그나저나 이렇게 널널하게 가다니 운이 좋네, 다리 뻗고 편하게 가볼까, 의자에 기댔다.

한참을 달리는데 기분이 쎄해서 보니, 아침에 택시타고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라, 왜 이쪽으로? 버스는 호텔에서 걸어 5분도 안 될 곳에 위치한 정류소에 도착했다. 헐. 난 아침부터 터미널을 왜 간거지? 당황하고 있는데, 버스는 꾸역꾸역 사람을 태우기 시작했다. (내 친구 양파는 여기서 내렸다.) 

버스는 순식간에 사람과 짐으로 가득찼다. 순서는 이랬다. 일단 모든 좌석에 사람을 태운다. 머리위 선반과 좌석 밑에 짐을 밀어넣는다. 미처 못 집어넣은 캐리어를 통로에 줄지어 세운다. 통로에서 짐을 치우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내릴 수 없게 만든다. 와, 이게 되는구나. 버스는 포화상태가 됐다.

사람과 짐을 가득 싣고도 버스는 출발할 생각이 없었다. 뒷자리의 중국인들이 차장에게 몇 시에 출발하냐고 물었다.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중국인들의 발음이 대단하기는 했다.) 다시 물었다. 또 못 알아들었다. 답답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몇 시에 출발하냐고 묻는데? 아아, 여덟시 반에 출발해. 야, 지금 여덟시 삼심칠분이야. 어, 그러네? 와하하. 차장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니 버스안 승객들도 따라 웃었다. 아, 근데 진짜 언제 출발해? 아마 곧? 좁은 버스 안을 구석구석 확인 하고 나서야 버스는 문을 닫았다.

만달레이까지 가는 도중 버스는 두 번 휴게소에 들렀다. 첫번째 휴게소에서는 행상 아주머니들이 버스 차창으로 다가와 음식을 팔았다.

네 개들이 삶은 메추리알을 두 봉지 사고 돈을 드리니 잔돈이 없다며 한 봉지가 더 넘어왔다. 메추리알 열두 개를 차창에 늘어놓으니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뿌듯해하는 사이 버스는 다시 2번 국도를 달렸다.

두번째 휴게소에는 커다란 식당이 있었다. 구경도 할 겸 버스에서 내려 잠시 돌아다니다 행상 아가씨에게서 귤과 메론무침(!)을 샀다.

사진 찍자고 하니 어찌나 부끄러워하는지 카메라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렵게 한 장 찍고, 폴라로이드로도 한 장 찍어주니, 폴라로이드를 처음 보는지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흔들라고 설명해주니 부채질 하듯 하는데, 점차 상이 맺히는 걸 보고는 장사고 뭐고 내팽개치고는 가족들에게 뛰어가버렸다. 인사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다 버스에 올랐다.

2번 국도를 달리던 버스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평원을 보고 있는데 버스가 속도를 줄였다. 문제라도 생긴걸까, 불안한 마음에 기웃거리는데 버스가 대로변에 완전히 멈춰섰다. 문이 열리고 차장이 문밖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아 시선을 따라가니, 스님 한분이 서 계셨다. 차장은 스님에게 물병을 세 개 건네고는 합장을 했다. 공양이구나. 버스는 천천히 출발했다.

멀리 천년 고도 만달레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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