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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성 Dec 07. 2024

나르시시스트 큰 시누이(3)

 아들 학원 문제로 큰시누이가 전화를 안 받는 것을 보고 큰시누이가 내 생각보다 훨씬 속좁은 사람이라는 것을 감지했다면 시댁 식구들 앞에서 전화 안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는 수치심과 함께 허탈감이 생겼다.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그 후 아버님 응급실 문제로 명령투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것을 보고는 '다시는 내가 먼저 전화 안한다'라는 결심을 했다. 


 내 전화를 의도적으로 먼저 안 받고, 할 말 있으면 옆에 있는 자기 남편을 시켜서 전화를 하거나 카톡 메세지를 보냈던 사람이다. 

 자기 딸 결혼식에 우리랑 아버님, 어머님 안올까봐 전날에나 들려서 염탐했던 사람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록 친정 엄마나 내 동생도 참석해줘서 '고마웠다'  말 한 마디가 없던 사람이다. 

 우리와 진정으로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면 결혼식 후에라도 전화를 하거나, 남동생 2차 수술 후 항암을 하러 다니러 수차례 서울에 다니는 동안 몸은 어떤지 안부를 물었어야지.


결혼식 후 나에게 처음 전화를 걸어 한 말이

"00병원 예약해. 0시까지 00병원 앞으로 와"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큰 시누이에게 이용만 당한 것이다.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결혼 후 편입공부를 할 때 선뜻 천만원을 먼저 빌려 주신게 고마워서 조카들을 2년이나 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중학생이 된 큰 조카만 청주에서 데리고 있으라고 해서 선뜻 받아줬는데 그 후에는 둘째 조카도 청주에 보낸다며 데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두 조카를 데리고 있었지만 생활비는 커녕 반찬 한 번을 큰시누이한테 받아 본 적이 없다. 불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큰 형님 덕분에  시험에 합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큰 시누이가 청주에 새아파트를 분양받았을때  천만원을 갚을 수 있냐고 해서 그 돈도 다 드리고, 새 아파트 이사 축하선물로 100만원도 드렸다.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었다.



  조카들을 같이 데리고 있던 어느 날, 

큰 시누이는 어머님 생일날 아침 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버님, 어머님이 따뜻한 밥도 못먹고 들에 나가서 일한다고 엄청 화가 났다. 나한테 전화로 화를 내더니, 남편에게도 전화를 한 모양이다. 그 후 남편은 갑자기 이사를 간다며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큰시누이까지 나에게  전화해서  급하게 이사 안 가도 된다며 말렸지만, 우리는 결국 이사를 갔다. 

졸지에 남겨진 조카들 때문에 큰시누이와 매형은 어쩔 수 없이 청주로 나오게 되었다. 

 남편에게 급히 이사가는 이유를 물어보니, 큰 시누이가 남편에게 대뜸 전화해서는 집을 나가라고 했단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은 우리  전세금 5천만원과 큰시누이가 돈을 보태 매형 명의로 매수한 아파트이다. 당시 가격으로 9천만원이 조금 넘게 샀으니 실질적으로는 우리 돈이 훨씬 많이 들어간 셈이다. 

남편은 바로 매형한테 전화했다고 한다. 

이사 갈 테니 돈 5천만원 돌려달라고. 

큰 시누이한테 우리는 그냥 월세 한 번 안내고 자기 집 공짜로 쓰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머님 생신날은 나뿐만 아니라 분명 큰시누이도 같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먼저 일어나서 국 데워 드리고 저녁에 만들어 놓았던 반찬 꺼내고 고기 볶아서 드리면 될 일이다. 

 본인도 늦잠을 잤으면서 나한테 화를 낸 것이다. 

아침상 차리는게 며느리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나를 깨운던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좋게 얘기해도 되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큰시누이가 장사한다고 저녁 늦게 도착해서 그제서야 늦은 저녁 식사 하고,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지다 보니 늦잠을 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그만큼 큰시누이가 어려웠다. 어찌되었든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차리지 않은 내 잘못도 있다고 생각해서 큰 시누이에게 변명 한 번 하지 않고, 죄송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관계는 깨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끝없이 배려해주고 이해해주고 큰 시누이는 어느 새 그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손위라는 명분으로 통보식으로 명령하면 우리는 또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잘 따랐다.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해서 손수 차린 저녁밥을 대접하고, 친정엄마가 해오신 반찬도 싸서 보내주었다. 

진심으로 잘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는데 결과는 우리한테 고마워하긴 커녕 필요할 때 자기 손발로 이용하는 것이고,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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