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온 손님

어느 꿈 이야기

by 김경민

어느덧 낙옆이 물들어가는 가을이 찾아왔다.

창밖으로 불어오던 뜨거운 바람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바람이 그녀의 몸을 스쳐가는 계절이었다. 그녀는 위자 위에 놓인 담요를 집어 들고 가볍게 몸을 둘렀다.


그때 마침 괴종시계가 울렸다. 벌써 낮 12시였다. 낡은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찬장을 열자 작은 유리병 속에 마른 홍차 잎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홍차를 꺼내들고서 주전자에 넣은 뒤 물이 끓을 때까지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자 낙옆은 힘없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녀가 보기에 그것은 메마른 가을에 내리는 단비같은 소나기였다. 연약하지만 존재하는 빗방울 중 가장 아름답게 추락한다. 그녀가 창밖에 시선을 빼앗기던 중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곧바로 불을 끄고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잔에 홍차가 붉게 우러나왔다. 탁자에 앉아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자 차가웠던 몸의 한기도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어렴풋이 한 사람을 떠올리던 그녀였다. 그날따라 오랫동안 묻어 놓았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독히도 그녀를 괴롭히던 기억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날을 떠올려도 그녀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다만 이것이 다시금 자신을 불쑥 찾아올 때면 입이 조금 써질 뿐이었다.


애써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다시 바람이 불었다. 낙옆이 정신없이 회오리쳤다.


그때였다.


오두막 밖으로 낙옆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쏟아지는 낙옆 비를 뚫고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오두막으로 향하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홍차를 연거푸 홀짝이며 상념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똑똑’

적막이 흐르던 오두막에 짧고 명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다. 그녀는 누가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이 외딴 숲속에 있는 낡은 오두막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다.


채선은 무덤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곧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채선은 문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


익어가는 가을에 온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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