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씹었다.

지금을 쓰다

by 초록여유

글을 쓰기 위해 사우나를 갔다 왔다. 화요일에는 8개월 만에 미용실에 가서 롤매직 펌을 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새해 들어서 처음 열린 독토 모임에 가기 위해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면도날>을 읽었다. 장장 페이지가 530에 달했다. 두꺼운 책을 잘 읽지 않으려는 버릇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무적'읽기에 동참을 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해가 바뀌고 나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많이 고민이 되었다. 소재거리도 바닥이 났는지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걱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서 그냥 있었다. 핸드폰에서 글을 쓰라고 압박 비슷하게 아니 이건 '심한'

압력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팔로우한다는 문자를 받고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강추위, 맹추위 속을 뚫어버리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서 사우나로 들어갔다. 체감 온도 영하 7.7에서 건식 사우나 온도 58이었다. 65도의 차이는 꽤나 컸다. 뜨거운 물에도 차가운 물에는 더더욱 들어갈 수가 없어서 탕에서 오랫동안 서있다가 앉았다. 며칠 동안 계속되었던 추위 덕분에 고양이 세수만 하고 살아서 사우나 아니고는 해결책이 없었다. 몸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있을 때 '아 사우나, 롤 매직 파머, 면도날'이 세 가지로 글을 쓰자는 생각이 아르키메데스 식 발상이 떠올랐다.

겨울이 되면 연례행사로는 갓 구운 붕어빵을 사 먹고, 단팥죽을 끓여서 먹고, 사우나를 다니는 것이었다. 겹겹이 옷을 입었지만 운동하면서 흘리거나 잠을 잘 때 땀이 날 것이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집에서 샤워를 한다는 것은 감기로 가는 직행이었다. 아침을 커피 한잔 내려서 삶은 달걀, 사과 반쪽, 냉동실에 굴러 다녔던 단팥

호빵을 쪘다. 잘 익은 동치미랑 맛나게 먹고 집을 나섰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 지금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많은 생각은 거두고 거울 앞에 있는 자신에게만 집중했다. 여유라고 말하고 나니 내가 그 속에 있었다. 일본 온천이 아니어도, 온양 온천이 아니어도, 한 달로 결재해 놓은 것이 아니어도 충분했다. 일상의 생활의 한 부분인 것에 더 만족함을 느꼈다. 사우나에서의 따뜻함이 나를 깨웠다.

미용실 갔다 온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아내의 미모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남편의 한마디가 걸작이었다. '머리가 산발인데 왜 미용실에 안 가고 난리야' 한 달에 한 번씩 이발을 하는 습관인 사람의 눈에 거슬렸다보다. 미용실에 예약을 해 두었다고 그리고 '아내의 미모에 더 이상 관심은 거둬'라고 말했다. 롤 매직 파마는 15년 동안 고집해 온 스타일이다. 미용실도 8년 정도 같은 곳이었다. 여자 원장님은 솜씨가 뛰어난 기술자이다. 매직 파마가 잘못되었다고 일주일 후에 시간을 내서 다시 해주는 사람이었다. 찰랑찰랑한 머리를 고수하는 이유는 뽀글뽀글한 헤어스타일보다 젊어 보이질 않을까 하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찰랑찰랑한 머리는 하고 있는 얼굴은 점점 늙어가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어서 더 서글프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의무적 책 읽기를 해오다 보니 교과서처럼 교양서적을 읽어 내는 습관이 들었다. 교과서 시험 범위가 넓으면 왠지 공부하기 싫어지는 것처럼 두께, 페이지 분량이 책을 선정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기도 한다.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기는 더 힘들어졌다. 소설을 읽다가 앞에 나온 내용을 잊어버려서 몇 번을 되돌아간 적도 있어서 두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런데 명작이라는 게 어느 시점의 고비를 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서 또 읽는 맛이 나서 매력에서 벗어나길 쉽지 않다. 면도날 주인공 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면도날, 민음사, 한 인간이 고결하고 완벽해지면 그런 성품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제가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삶을 이끌어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죠. 물론 영향이라고 해 봐야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작은 물결이 이는 것처럼 아주 미미할 겁니다. 하지만 하나의 물결은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은 그다음 물결로 이어지죠. 그렇게 되면 몇몇 사람들이나마 재 생활 방식이 행복과 평화를 준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잖아요.(p464 ~465 발체) 레이는 돈을 벌기보다는 삶을 체험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붓는 인물이었다. 물론 든든한 후견인 덕분이지 현실은 이사벨처럼 돈을 밝히고 야무지게 살아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은 말했다. 원래 전작 읽기를 추구하지 않는데 서머싯 몸의 작품은 전작 읽기가 되었다. 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 인생의 굴레, 면도날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우나를 갔다 오고, 머리를 예쁘게 하고, 두꺼운 면도날을 읽고 이렇게 세상없는 '인생 여유'를 부려봤다.

지금, 현재를 부여잡고 글로도 옮겨 봤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 2에서 이렇게 나온다. 삶과 꿈은 같은 책 속의 다른 페이지들이다. 지금이 책 속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충실하게 한편으로는 여유롭게 살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고 감사하다.

천리향과 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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