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여의도의 분주한 사람들 따라서 겨우 만원의 지하철 9호선을 탔다가 하마터면 환승역인 샛강을 지나 노량진까지 갈 뻔했다. 그 사연인즉슨 겨우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를 걷기 싫은 마음 때문인 것도 있지만, 겨울바람을 뚫고 그 거리를 걸을 엄두가 나지 않은 탓도 있다. 특히 여의도는 고층빌딩에 갇혀서 폭발적으로 불어 재끼는 바람의 흉포함이 극악에 달하지 않나.
하여튼 이렇게 바람부는 날이면, 이라고 글 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다 불현듯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1990년대 초반에 유하 시인이 쓴 시집의 제목 아니던가. 물론 이건 그 시집에 수록된 연작시의 제목이기도 한데, 영화 '비열한 거리' '쌍화점' '강남 1970'을 찍어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해진 유하 시인은 이 제목으로 최민수, 홍학표, 엄정화 주연의 영화를 찍기도 했었다.(여담이지만 그게 엄정화의 첫 주연작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의 OST를 담당한 이는 그 유명한 신해철 되시겠다.
이 영화의 OST는 훗날 신해철이 넥스트 3집에 리마스터링 해서 수록한 '코메리칸 블루스'(Komerican Blues)로 유명하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코메리칸 블루스'까지 오기까지 시집, 시, 영화를 거쳐야 했다는 내 미로 같은 사고방식이 참으로 암담하지만, 거기서 더 확장해 나가 노래 속 가사인 '점점, 더, 빨리빨리, 이것이 천구백구십년이다'까지 도달했음에도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다는 걸 미리 고지해 두겠다.
사실 압구정은 과거 그저 논밭 뿐이었다. 서울의 중심은 강북이었던 1960년대 후반, 폭발적으로 서울 인구가 급상승하자 서울시는 특단의 대책으로 강남신도시개발을 기획하게 됐다. 마침 지금의 한남대교인 제3 한강교가 준설된 것도 강남 개발의 시발점이 됐다. 그래서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다 지어진 시점에서 등장한 혜은이의 노래 '제3한강교'가 강남 개발을 상징하는 곡처럼 쓰이고 있는 것일까.
여의도 개발도 그즈음부터였다. 김종필 당시 국회의장이 국회의사당을 여의도에 짓겠다고 발표한 후 김현옥 전 서울시장 주도 하에 여의도 개발이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당시 서울 행정부시장이었던 차일석의 입김 속에 여의도순복음교회도 개발 참여 조건으로 그 인근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이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지었던 곳은 삼풍건설산업으로, 훗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빨리빨리 개발'의 역풍을 제대로 보여준 기업이라는 점이 꽤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대형 기반 시설들이 들어서고 아파트들이 지어지면서 지금의 여의도 풍경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강남과 여의도는 이후 정말 급속도로 성장했다. '코메리칸 블루스'에서도 등장하듯 '아차하는 사이에도 길모퉁이 한 곳에는 빌딩들이 들어'서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급속 성장의 부작용들은 앞서도 언급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나 그 앞서 일어났던 성수대교 붕괴처럼 대형 참사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건물만 무너졌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은 '돈'만 외치는 돼지가 되고 있었다. 아파트에 매달렸던 어느 남성의 외침처럼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있었던 걸까. 영화가 나오던 1990년대 초반 시기, 수입 오렌지족들은 외제차를 타고 압구정동을 돌아다녔고, 그걸 따라 한다며 일부러 오렌지족 특유의 어눌한 말투를 하고 다니던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것도 딱, 1997년까지였다. 외환위기가 닥쳤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듯 경제가 무너져 내렸다. 성장만을 앞세운 기업들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이 원인이었다. 뭐든 급속한 성장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2001년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2002년 성공적으로 한일월드컵을 개최했다. 그리고 2018년 평창올림픽을 유치했으며, K팝과 K드라마, K영화들이 'K브랜드'로서 승승장구했다. 외환위기 극복 후 23년이 지난 2024년의 풍경이다. 그리고 압구정과 여의도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에서는 어느새 54년이 흐른 시점이기도 하다.
누구나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누군가는 홀로 병들어 아무도 모르게 숨을 거둔다고 하고, 누군가는 마음의 병 숨기다 홀로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들이 유령처럼 도시를 흉흉하게 떠돈다. 밤마다 간판의 불빛들은 화려하게 점멸하지만 낮에도 햇빛 안 드는 곳에 사는 이들이 있다. 익명에 숨어 글을 칼처럼 쓰고, 돈에 취하고, 약에 취하고, 술에 취해서 비틀 거리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모두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지만 그 속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신해철이 쓴 '코메리칸 블루스' 속 '과연, 왜, 이게 뭘까,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생각을 하지 마라, 앞뒤를 이리저리 재다간 평생 촌티를 벗어날 수 없다'라는 가사가 여전히 유효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일까. 유하 시인이 1991년 발표한 시집 속에 수록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7'에는 이렇게 쓰여있다더라. "그 누가 저 은총의 도시 가득 무진장 쏟아져내리는 불의 폭포수를 보며/ 폭포가 말라버린 내일의 암흑 따위를 생각하겠는가/ 엄지손가락만 내려지면 너도 나도 뜰 세상"이라고.
바람 부는 겨울, 여의도의 어느 지점을 지나다 압구정동의 시간들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 생각의 바람은 결국 신해철과 유하를 얘기했다. 난 이 바람 부는 날, 과연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었나 싶었다.
글로 이 생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웠다. 겨울의 시린 공기를 폐 속 깊숙하게 집어넣듯 호흡하자 코끝이 찡했다. 술이 당겼다. 이왕이면 좋은 술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1년 전, 비싼 돈 주고 산 메이커 패딩의 지퍼를 올렸다. 여의도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바람이 거센 이유를 모르겠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