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이라는 단어에는 내 짧은 표현으로는 이루 풀어낼 수 없는 몽글한 느낌이 잔뜩 담겨 있다. 첫사랑, 첫키스, 첫해, 첫맛. 시작을 앞둔 두려움과 설렘, 시작을 했다는 대견함과 뿌듯함,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시간들에 대한 희망과 희열들. 그 한아름의 의미들이 짤막한 '첫'에 담겨 그 어느 날의 기억들을 완성한다.
첫눈이 소복이 내렸다.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은 하나 같이 하얀 모자를 쓰고 있고, 사람들은 새치 머리를 하고 종종걸음을 걷는다. 아이들은 눈을 뭉쳐 새하얀 이 드러내고 함박웃음 지으며 던져대는가 하면, 누군가는 집 앞 쌓인 눈을 쓸기 위해 빗자루를 열심히 흔들어댄다. 그런 풍경들을 벗 삼아서 하루를 보냈다.
어젯밤에는 첫눈을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오래전 대학에서 술 마시며 즐겨했던 건배사가 있다. 김영승 시인의 '반성 21' 속 '술 먹자. 눈 온다, 삼룡이가 말했다'다. 그 간결한 문장에 담긴 따뜻함과 설렘이 있어, 굳이 그걸 잊지 않고 눈 온다길래 술을 마셨다. 비가 흩날리는 밤, 첫눈을 맞고자 굳이 아득바득 밤을 지새웠다. 뭐든 처음이 좋으니깐. 그 처음을 오롯이 온몸으로 맞고 싶다는 생각에 취했다.
첫눈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때, 비에 젖어 쌓이지는 않는 눈이지만 내일 되면 꼭 첫눈 위에 발자국을 새기고 싶다고 되새기면서 걸었다. 싸락눈이 유성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하기 전, 창문을 열어보니 어느새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아직 덜 떨어진 낙엽 위에 눈이 쌓여 가을과 겨울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듯했지만, 코끝이 시린 걸 보면 이제 겨울이 문을 활짝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온 게 확실한 듯했다.
옷장에서 지난 1년 동안 숨어있던 패딩 점퍼를 꺼내 입고 밖으로 향했다. 입에서는 담배 연기처럼 입김이 나오고 있었고, 잠옷 바지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아찔했다. 이른 새벽이라 다행히 누군가의 발자국은 없었다. 비와 눈이 섞여 질척였지만, 거기에 꾸욱 발자국 하나 남겼다. 다시 쌓일 눈에 가려지겠지만 첫눈에 첫 발자국이라니. 찌든 때를 지우고 무결해진 느낌을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유자차를 마셨다.
그럴 때가 있다.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데 계속해 파도가 나를 제자리에 두는 것만 같이 만들고, 열심히 뛰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결승선보다 출발선이 더 가까운 것 같은. 누구나 고민은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나란 자기반성에 찌들어, 어떻게,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를 만큼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점들.
어느 아무개는 그런 것을 두고 '슬럼프'라고 하고, 또 다른 아무개는 '우울증'이라고도 하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의 창을 바라보고 있는 어떤 아무개는 '노오력 부족'이라고도 한다. 어떤 말이 붙어도 모든 의미가 잘 통하는 것 보니 '그저 그런'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누구나 겪는다고 해서 누구나 버텨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라는 억울함이 부아처럼 치밀어 오를 때도 종종 있다.
겨울이 오기 전, 낙엽처럼 내 마음속에 그런 감정들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어디서 출발했지 싶고, 어떻게 왔나 싶어 우물쭈물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불안했다. 실패한 인생인가 싶지만 살아온 궤적들은 실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들에 생긴 생채기로 이렇게 아파하나 싶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것들에 마음 두며 이도저도 못할 것 같았다.
점심쯤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 눈 위에 내가 남겨둔 발자국은 이미 다시 쌓인 눈에 흔적을 감췄다. 하지만 그 위로 누군가가 걸어간 흔적이 보였다.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눈은 그저 어딘가에 쌓여, 어딘가로 가는 누군가의 발자국을 기록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그걸 다시 덮거나 녹아 없애겠지. 첫눈의 첫 발자국도 있자면, 뒤늦게 오는 눈 위의 첫 발자국도 있는 법이다.
나도 모르게 그 누군가가 걸은 발자국 위에 발을 얹으며 슬쩍 따라 걸었다. 크기도 다르고 보폭도 다르지만 결국 어딘가로 가는 발걸음의 순간들은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서 간 이 덕분에 걷는 법을 다시 배운 것 같았다. 첫걸음마를 뗀 것만 같아 뿌듯했고, 설렜다. 그러다 갈림길이 나왔다. 지하철로 가는 길목과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가 따라 걷던 발자국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하철로 가는 길목으로 향했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나 혼자만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누군가의 발걸음과는 이별했지만, 아련함과 후련함보다는 설렘이 있었다.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발걸음은 그런 마음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래도 무거운 마음보다는 설레는 두근거림이 더 좋을 것 같아 발걸음 따라 마음 움직이기로 했다.
어느새 눈발이 더 거세졌다. 옷 젖을까 쓴 우산에 쌓인 눈을 퉁퉁 털어대며 종종걸음 했다. 첫, 첫, 젖은 눈이 소리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