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두 달 동안을 시름하면서 읽던 허먼 멜빌의 <모비딕>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2024년 한 해도 어느새 다음 날 하루 밖에 남겨두고 있지 않은 시점이었다. 창밖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캄캄했다. 골목 저 멀리의 도로에서 내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도 없었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옆집 청년의 발작과도 같은 고함소리도 없었다.
방의 조도를 낮추고 주위를 돌아봤다. 좁디좁은 원룸의 한 구석에서 삐걱이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나의 모습이 그보다 더 조그마한 거울에 반사됐다. 거울 속 애처로운 남자와 눈이 마주칠까 재빨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지만, 직사각형의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TV를 틀었지만, 흘러나오는 소리와 화면이란 연말의 설렘이 아닌 더욱 무거운 슬픔뿐이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희망의 순간이 아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의 처절함 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음속 저 구석에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활화산처럼 터뜨릴 만큼 뜨겁지는 않아서, 뭐라고 표현할 만큼 정확하지는 않아서 그냥 마음에만 담아둔 것들이 내 속만 애태우고 있었다.
다 읽은 책을 책장에 집어넣으려다 그대로 두고 잠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낡은 천장 벽지의 얼룩들. 점점 더 번져나가는 것 같은 건 나의 착각일 뿐일지라도, 그 밑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 나의 의지였다. 바뀌어야 한다, 바꿔야 한다라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추상적인 그것처럼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아서 나는 점점 더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저 수평선을 따라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이를 얼마 먹지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간이 지난다는 게 막연히 두려워진다. 인생은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이라는데, 나는 과연 뛰고 있는 것일지 혹은 제대로 맞는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일지 끊임없이 고뇌한다. 2024년의 시작에서도 그 고민을 끌어안고 나의 길을 찾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것 역시 작심삼일의 저주 마냥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전혀 이루지 못한 일이 됐다.
사람은 모두 제각각의 시계를 가지고 있다는데, 나의 시차는 표준 시간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을까. 한해의 마지막에 하는 것이 고작 후회와 번민뿐이라니. 씁쓸함이 입 안을 채웠지만 어떻게 헹궈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렇게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였나. '카톡'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올 한 해도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시작되는 누군가의 안부 인사. 나 역시 묻고 싶은 이들이 많지만 섣불리 보내지 못한 인사를, 내가 먼저 받으니 들게되는 인사를 보낸 이의 안부. 몇 차례 메시지를 주고 받고 내년에는 행복한 일만 가득하라는 답장을 마지막으로 연락을 마무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에 패딩을 몸에 얹고 밖으로 나왔다. 담뱃갑에는 담배 한 개비만 남아있었다. '이걸 다 피우고 담배를 끊어야지'라는 생각을 올 한 해에만 수십 번을 했을 터다. 그러나 이것 하나 끊지 못하고 한겨울에도 입김 후후 내불며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건 나의 의지박약인가. 끊임없는 자기혐오에 휩싸여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별빛이 보이기는 했으나, 무슨 별자리인지는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 다 읽은 책을 책장에 넣기도 전에 새로 읽을 책부터 구석에서 끄집어냈다. 이미 세 달 전에 산 책이었지만 <모비딕>을 다 읽을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새 먼지가 쌓여 있었다. 먼지를 후 불어보니 입 안에 남은 담배냄새가 났다. 차라리 내 마음속에서 끓고 있는 것들도 이런 냄새가 난다면, 누군가에게 이런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새해를 맞아 연락을 해볼까 하는 이들의 이름을 연락처에서 뒤적거렸다. 그러나 선뜻 연락해 '잘 지내셨나요?'라고 문자를 보내기에는 그간 연락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는 마음에 뒤적거림에서 멈췄다. 그저 그들이 그들의 시간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음을 믿으며 나의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걸 피했다.
그러다 아침 뉴스에서 본 한 문자메시지를 떠올렸다. 여행을 잘 다녀왔냐는 물음에 여전히 읽음 표시가 뜨지 않는 묵묵부답의 메시지창. 그곳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멈춰 있었다. 오지 않는 답장 속에는 무수한 시간의 사연들이 담겨있겠지만, 멈춘 시간 속에서 되돌아오는 건 슬픔의 벽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어서,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내 속에서 애끓는 추상적인 저 무엇인가를 표출하지 못하고 계속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도 고작 연말 인사 하나 보내는 것조차 부끄러워 주저하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괴로워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연말. 이제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새로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겨야 할 때지만, 여전히 '다 읽은 게 맞나?'라는 미련에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했다. 여전히 누군가는 2024년의 마지막 페이지를 슬픔으로 붙잡고 그 시간 속에 멈춰 있을 때, 나 혼자 책을 내려놓아도 될까 고민되는 순간의 연속들. 이 영겁의 2024년을 끊고 새해를 알리는 종은 과연 어떤 소리를 낼 것인가.
그저 그렇게 멈춰있는 듯한 방 안의 적막을 뚫고 저 멀리 도로에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저 밖 시계의 초침과 분침, 시침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나의 시차와 더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무엇인가 끝이 나고, 무엇인가 시작되고 있는 저 바깥의 시간. 난 이젠 정말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내 시계를 움직여야 한다고 고통스럽게 되뇌면서도, 미련하게 <모비딕>의 마지막 문장을 슬픔에 잠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곱씹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관에 올라탄 채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 구슬픈 만가 같은 바다 위를 표류했다. 상어들도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스쳐 지나갔고, 사나운 도둑갈매기도 부리에 붕대를 감은 것처럼 날아갔다. 둘째 날, 배 한 척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마침내 나를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 그 배는 항로에서 벗어나 항해하고 있던 레이철호였다. 실종된 아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또 다른 고아인 나를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