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이 희붐하게 밝아올 때였다. 저 멀리서 도시의 비둘기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새벽을 일찍 시작하는 이들의 분주한 소리도 들려왔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코끝 시린 바람 덕분에 오늘도 꽤나 추운 날이 되겠구나 싶었다.
역시는 역시. 패딩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채로 집 밖을 나섰지만 귀와 볼을 아리는 바람이 불어오자 나의 한파 대책은 모두 무너져 내렸다. 다시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은 해야 하고 그래야 나의 삶이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잊지 않은 나였다. 손이라도 시리지 않게 하자는 마음으로 패딩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재빨리 발을 움직였다.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으로 가 버스를 환승해야 했다. 시간은 넉넉 잡아 나왔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날씨가 추워 어디라도 바람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지하철에 오르자 어느 정도 훈기가 돌았다. 물론 지상으로 움직이는 1호선의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한기가 꽤 지독했지만 버틸 만은 했다. 눈요기거리로 책을 펼쳐서 몇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자기 계발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언제가 받아온 책이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게 안쓰러워서 꺼내왔었다.
"자 여기 무릎보호대가 있습니다. 사이즈 조절용이어서 다리가 굵은 사람도 얇은 사람도 아주 편하게 착용할 수 있습니다."
책에 조금 집중을 할 수 있을까 했던 찰나에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곁에는 무릎보호대가 가득 실린 손수레를 두고 있는 한 중년의 잡상인이었다. 순찰대가 들이닥쳐서 잡상인을 잡아가는 풍경을 몇 번 봤던 터라, '여기서 과연 장사를 하는 게 맞을까?' 싶었다. 그래도 나의 기우를 뚫고 잡상인은 운 좋게 두 사람에게 무릎보호대 2장을 만원씩에 팔고는 다음칸으로 손수레를 잡고 이동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꽤 수지 남는 장사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장사 덕분에 집중하지 못했던 책에 다시 눈을 옮기려 했을 땐 시청역 플랫폼에 지하철이 이미 진입을 하고 있던 차였다. 젠장할. 두 페이지도 읽지 못한 책에 갈피를 하기도 뭐해서 그대로 덮고 가방에 욱여넣었다. 버스를 타러 올라가는 역사 안은 벌써부터 냉기가 돌아서 어떻게 위로 올라가나라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어떻게 하나. 올라가기는 올라가야 한다. 버스 배차간격이 들쑥날쑥 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해서 괜히 한 번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른 채로 한파를 견뎌야 했다.
역사에서 올라와 지상에 다다랐을 때는 저 멀리 '종로 11' 버스의 뒤꽁무니가 보였다. 제기랄. 아마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10분 남짓이 더 걸릴 것 같아 구 시청역사 뒤로 돌아가 흡연구역에 들어섰다. 담뱃불에 불을 붙이고는 손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입술로 담배를 오징어 씹듯 질겅이면서 연기를 빨고 내뱉고를 반복했다. 다 피우는 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요기를 마치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류장 건너편에는 '윤석열 대통령님을 지켜야 합니다' '나라가 망했다, 탄핵은 무효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가로수에 걸려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안전을 원한다면 기억해야 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노란 피켓을 든 사내가 보였다.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를 반대하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또 옆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얼굴을 커다랗게 박고 코로나 백신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문구들로 장식한 거대한 현수막이 보였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내란수괴 윤석열을 구속하라'라는 현수막도 간간이 보였다.
머릿속에는 언제 버스가 오는가라는 물음만 가득 차있었다. 10분은 지난 것 같은데 버스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약이 오르게 종로 9번 버스만 두 번이나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거나 저 지하철 역사에서 몸을 덥히고 나왔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이런 후회를 할 여유도 없다. 그렇다고 자리를 잠깐 비우면 버스를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이제 저 멀리서 초록색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종로 9번 버스라면 앞뒤 재지 않고 택시를 타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11번 숫자가 선명했다. 평소 타고 다니던 조그마한 콤비 버스가 아닌 커다란 버스가 등장했다. 내가 서있던 정류장 앞에 천천히 버스가 들어섰고, 저 건너편에서 팔랑거리던 현수막과 피켓을 든 사내, 전 대통령의 커다란 얼굴이 가려졌다. 버스의 문이 열렸고, 나는 일상대로 교통카드를 찍고 어디 앉을자리가 없나 눈으로 훑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버스는 오랫동안 틀어둔 난방기 덕분에 훈훈했다. 이제 추위는 물러갔다. 패딩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핸드폰을 바라봤다. 평소처럼 어떤 뉴스가 나왔나 하며 뒤적였다. 뉴스의 내용을 보고 괜히 혀를 끌끌 찼다. 버스는 사람들이 모두 타자, 정류장을 떠났다. 창밖의 어지러운 풍경을 뒤로하고 버스의 관성에 몸을 맡겼다. 유달리 추운 날이었지만 여기만은 따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정거장에서 다시 내려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