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어느새 한 달이 또 지났지만, 여전히 날은 차기만 하다. 덕분에 외투 주머니에는 어떤 짐 하나 들어가기 벅찰 정도로 손이 자리 잡고 앉아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가까스로 손을 꺼낼 때라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릴 때나, 훈풍 가득한 실내에 자리했을 뿐. 그렇게 손은 겨우내 햇빛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어두컴컴한 곳에서 파렴치한처럼 숨어 산다.
그동안 나 역시 종종 골방에 틀어박혀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할 만큼의 부끄러운 글을 썼다. 새해다짐처럼 처음에는 거창하지만 끝내는 아스러져버린 그 활자들은 컴퓨터 휴지통 어딘가에 박혀 삭제되어 버릴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겨우 언 손을 녹여 쓴 이야기가 그 정도의 가치도 못 가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지만, 이미 시작부터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듯 의연하게 다시 책상에 앉았다.
주말에는 바깥 세상사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하지만 바깥이나 안이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요지경 세상사의 이치다. 책을 읽으려다 굳이 포털 사이트 화면에 들어가 '오늘은 어떤 일이 있나?'라고 뒤적거리며, 또 한량의 시간을 보냈다.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소매를 걷고 나설 일도 아니면서 괜히 쓴소리만 입 안에서 까끌하게 중얼거렸다.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읽던 책에 바로 손을 뻗기보다는 괜히 책장을 바라봤다. 언젠가 소설, 에세이, 시, 이론 서적들을 정갈하게 정리했지만 또 어느새 중구난방이 돼서 내 마음처럼 어지럽다. 정리를 할까 싶었지만, 서브 책장의 책들까지 모두 끄집어내는 것에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뒀다.
책상에 앉아 그렇게 허송세월만 보내다 '노래나 듣자'라고 생각해 콜드플레이의 1집 앨범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로 긁었다. 그러다 메모장을 켰다. '왜 머릿속이 어지러운가' '무엇이 나를 무겁게 내려 앉히고 있나'의 주제로 간단히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했다. 크리스 마틴의 눅진한 목소리와 클래식 기타의 서정적인 소리가 얽히고설키며 창밖 햇살과 어우러져 나른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또 마음은 동했으나, 메모장에 글을 쓰던 걸 멈췄다. 마음은 가고 있으나, 마음 가는 대로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시인 김수영이 고궁을 나서며 느꼈던 것처럼 사소한 감정들이 내 마음 어딘가를 가득 채우면서 방파제를 쳐댔다. 잠옷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러다 문득 심보선의 문장이 떠올라 책장에서 시집을 꺼내 뒤적였다. '인중을 긁적거리며' 속 문장을 읽으며 다시금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그 문장들을 되새기면서 이 글을 썼다. 내 마음 가는 곳은 어딘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새해 벽두도 아닌 늦은 시점에 마주하며, 파렴치한처럼 숨 죽이고 있던 손을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꺼내 키보드 앞에 앉혔다.
자동 턴테이블이 바늘을 거두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힘차게 수건을 빨겠다면서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의 함성뿐. 그 속 일렁이는 물결의 소리를 들으면서 시인의 활자로 명상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는 생각은 비우지 않은 채로 이 문장을 되새김질하며.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