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른을 맞은 2021년은 한국 드라마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해였다. 드라마 에세이를 시작하고 나서 과연 어떤 드라마들을 다룰까 하였는데, 이때에 이 드라마만은 빼먹을 수 없겠다 싶었다. 바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다. 사실 한국 드라마의 태동기 때부터 드라마란 중·장년 여성들이 시청하는 콘텐츠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 1990년대 드라마에서도 드라마를 보는 아내의 리모컨을 뺏어 뉴스를 트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자주 그려졌다. 예외로 사극만은 중·장년 남자들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는 그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남성, 여성 구분 없이 모두가 드라마를 즐기기 시작했고, 정말 다양한 장르들의 드라마들이 소개됐다. 그렇지만 한국 드라마는 오직 ‘한국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했다는 한계성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겨울연가>의 대박 이후 한국 드라마는 더 이상 ‘한국 시청자’만을 타깃으로 하지도 않았고, 점점 다양한 국가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글로벌화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새로운 세상을 눈을 떴다.’
내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을 때가 있다. 영화 <달콤한 인생>을 처음 보게 된 때였는데, 1960년 개봉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가 아닌 2005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한 계기로 <달콤한 인생>을 관람한 나는 “영화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어떻게 영화 공부를 시작할까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보자’라는 마음부터 먹었고, 다양한 영화들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영화들은 <해리포터> 시리즈라던가, <반지의 제왕> 시리즈 같은 판타지 장르였고, 액션과 SF 장르들로 편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막연하게 오래된 영화들을 찾아 섭취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때 좋은 영화 교과서가 있었다면 언제나 영화 입문자에게 가장 많이 추천되는 도서인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였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부족했던 나는 오래된 영화들을 P2P 사이트나 토렌트 사이트들을 통해 찾아보고는 했다. 그러다 최초의 영화라고 치부되는 <열차의 도착>―사실은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최초다―부터 최초의 SF 영화 <달 세계 여행>, 최초의 서부영화 <대열차 강도>,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 등을 차례대로 보게 됐다.
‘최초’를 따라가는 여행을 떠나다가 영화 사조에 푹 빠지게 됐는데, 그때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사로잡은 사조가 프랑스 ‘누벨바그’였다. 프랑수아 트뤼포라든가,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와 같은 감독들의 영화에 사로잡힌 나는 고등학생 시절을 ‘시네필’이 되기 위한 초석으로 다질 수 있었다. 그러다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을 보고 나서는 뭔가 시작점에 돌아온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당시 내 인생의 전부는 영화였고, 영화가 아니고서는 뭔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은 영화를 그저 애호가 수준으로만 보고 있는 상황인데, 굳이 영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리치오토 카뉴도의 발언을 인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영화가 ‘영화 예술’이 될 수 있었던 초석을 마련해 준 인물. 그의 등장 이전에는 문학, 조각, 회화, 음악, 연극, 무용만이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영화는 예술의 축에 끼지 못했었다. 지금은 영화를 예술로 보는 이들이 많지만 100년 전에는 새롭게 등장한 ‘매체’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기 때문.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프랑스에서 논의되는 주제였기는 하지만, 예술의 국가이기에 그들의 공인을 받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리치오토 카뉴도는 영화를 제7의 예술로서 명명하면서 프랑스 주류 예술계에 영화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줬다. 이후 수많은 매체들의 예술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고, 현재는 사진, TV, 라디오 등의 매체예술을 제8의 예술, 만화를 제9의 예술로 확립하고 있다. 제10의 예술은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 중인데 과연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냐에 대한 문제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없냐를 두고 논할 것은 아니어서 제쳐두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드라마라는 예술에 대한 부분이다. 사실 사진과 TV, 라디오 등의 매체 예술을 한꺼번에 제8의 예술이라는 범주에 넣는 건 굉장히 폭력적인데 각각 가지는 특색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 같은 드라마 애호가에게는 굉장히 화가 나는 대목인데, TV드라마와 라디오 드라마는 성질도 다를뿐더러, 왜 드라마라는 예술 장르가 독립적으로 분류될 수 없는가에 대한 생각이 문득문득 분노 기제를 건드린다.
이미 이전에도 드라마가 예술로 분류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순전히 한국 사회에 국한되게 봤을 때, 여전히 드라마를 예술로 분류하고 있다고 보는 건 힘들 것 같다. 내가 아무리 ‘드라마도 예술입니다’를 주창하더라도 드라마를 소비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아서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드라마는 독립된 예술로서 치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건 넷플릭스의 출현과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 전부터 대한민국 드라마 시스템은 폭발적인 변화를 맞고 있었다. 대규모 자본을 가진 중국 시장과 일본 시장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채널과 제작사들이 꽤 많은 제작비를 들여 대작 드라마들을 탄생시키기도 했으며, 로맨스나 가족드라마, 사극 등으로 국한되던 장르들이 액션, SF 등으로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한국 드라마는 따분해’라고 생각하면서 미국 드라마나 영국 드라마로 시선을 돌렸던 시청자들이 다시 한국 드라마에 눈길을 돌린 것도 이 덕분이었다.
대규모 자본들이 드라마 제작 시장으로 흘러들면서 드라마 제작 현장에 영화감독들이나 스태프들의 유입 현상도 늘어났다. 그리고 이 사소한 성장들이 ‘폭발’한 것이 바로 <킹덤>의 등장이었다. <킹덤>은 그야말로 센세이션 했으며, 영화가 가진 평균 2시간 러닝타임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이제 ‘한국에서의’ 드라마는 TV라는 매체의 한계성과 영화보다 뒤떨어지는 수준이라는 편견을 뛰어넘어 하나의 예술이 됐다고 생각을 주변에 설파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 순간 <오징어 게임>이 등장했다. 코리아 드라마 드림이 시작된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총 9부작으로 제작된 드라마로, 영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을 연출했던 황동혁 감독이 극본을 쓰고, 직접 연출을 맡았다.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후, 사업까지 실패하고 이혼까지 당한 성기훈(이정재 분)이 의문의 계기로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는 이야기가 기본 골자다. 각각 1억 원의 가치로 목숨을 건 456명의 참가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참여한 서바이벌 게임이 ‘목숨을 걸고 하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성기훈 역시 마찬가지.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공유 분)가 건넨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그 결과 이 게임에 참가하게 된 것뿐이었다. 하지만 첫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면서부터 이들은 이게 ‘단순한 게임’이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잔혹한 게임’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후부터 <오징어 게임>은 몰아친다. ‘달고나’에 새겨진 모양을 제한시간 내에 바늘로 추출해 내야 하는 게임부터, 떨어지면 바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고공에서 펼쳐지는 줄다리기, 상대의 구슬을 뺏어 우승을 차지해야 하는 ‘1 대 1 데스 매치’인 구슬치기, 강화유리와 깨지기 쉬운 유리를 골라 고공을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 건너기 등의 게임이 펼쳐진다. 모두들 처음에는 이 목숨을 거는 게임을 부정하지만 점점 456억 원의 상금이 가까이 다가오고, 자신이 그 상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부터 필사적으로 게임에 임한다. 그리고 부자들은 목숨을 건 게임을 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유희를 즐긴다.
<오징어 게임>은 이러한 내용을 통해 빈부의 양극화에 대한 문제를 우화적으로 표현해냄과 동시에, 어린 시절 즐기던 놀이에 이제는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어른들의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동심을 잃고, 돈이 우선이 되어버린 어른들. 이건 분명 어린 시절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기에 더욱 멜랑꼴리한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오징어 게임>은 ‘빠른 고도성장’이라는 ‘코리안 드림’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서 개인의 삶을 짓밟아야 했고, 1등이 되기 위해서 곁에 있는 사람을 짓밟아야 했고, 어떻게든 ‘성공’만 하면 된다는 목표를 향해서만 달려야 했던 사회. 이건 ‘한강의 기적’이라고 명명했던, ‘코리아 드림’의 실체였다. 그리고 이 ‘코리아 드림’은 모든 국가들이 꾸었던 ‘글로벌 드림’이기도 했다. 이러한 메시지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재미가 있어서였을까. ‘가장 한국적’이었던 <오징어 게임>은 글로벌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제대로 성공했다.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국가들의 스트리밍 차트에서 오랫동안 최정상에 머무르면서 흥행을 이어갔고, 국내외 수많은 상들을 휩쓸었다. 특히 <오징어 게임>은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드라마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이정재), 감독상(황동혁)을 수상하면서 비영어권 콘텐츠 최초로 트로피를 거머쥐는 성취를 이뤄내기도 했다. 이러한 글로벌적인 관심에 모두가 환호를 질렀다. 정치권에서는 앞으로 <오징어 게임>과 같은 K드라마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면서, 창작자들의 권익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그러면서 K영화, K팝, K드라마가 한국 콘텐츠 시장을 이끄는 삼두마차가 됐다는 평가도 쏟아졌다. 이 덕분에 <오징어 게임> 이후 드라마 대홍수 시대가 열렸다. 다양한 제작사들과 OTT, 채널에서 공격적으로 드라마 콘텐츠들을 만들어댔다.
하지만 분명 <오징어 게임> 이전에도 드라마들은 존재했다. 작가들은 시간도 제대로 보장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극본을 써내야 했고, 제작사들은 안전한 투자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막대한 제작비를 끌어다 써야 했다. 덕분에 드라마 한 편이 망하게 되면 파산하는 제작사들도 부지기수였다. 현장에서도 늘 사투였다. 생방송 같은 촬영이 이어졌고, 젊은 스태프들을 비롯해 나이 든 스태프들이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드라마를 촬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과로로 인해 쓰러지거나, 안전하지 않은 촬영 현장에서 다치고 사망하는 스태프들도 다수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드라마는 늘 만들어졌다. 사고가 터지면 임시방편 해결만 있었을 뿐, 근원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드라마 산업은 날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배를 채우는 건 현장의 스태프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다. 늘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들은 고달파야 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면, 그동안 보이던 세상도 달라져 보인다. 나는 한국의 드라마가 단순히 산업을 뛰어넘어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영상은 물론, 스토리에서 전해주는 메시지, 이것을 짜임새 있게 구축하는 연속된 에피소드들을 직조해 내는 극본과 연출의 협업. 이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예술이 되고자 했던 드라마가 꿈을 이룬 지금 바라봐야 하는 건 ‘어떻게 더 예술적 성취를 낼까.’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나서야 쓰러졌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았듯이 ‘한국 드라마’가 ‘K드라마’가 된 이 시점에서는 이제 불합리한 드라마 제작 현장을 돌아보아야 한다.
456억원을 향해 목숨을 걸었던 참가자들의 결말이 우리 모두의 결말이 되지 않으란 법은 없다. 그리고 산업적 발전을 위해 내달리는 드라마들의 현실이 <오징어 게임> 속 풍경과 다르지 말란 법도 없다. 진정한 예술은 현실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이상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을 소비하고 탐미하는 우리는 이상향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예술가가 발을 붙이고 있는 땅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이 만들어낸 ‘K드라마 신화’의 토대에는 ‘드라마 시장의 현실’이 있다. 지금도 춥고 더운 날씨에서 고군분투하면서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 모든 드라마들이 글로벌 흥행을 이뤄내고 시청률 대박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K드라마 드림’의 이면이 어두울 필요는 없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다고 하지만 밝은 빛이 스스로를 어두움이라고 칭한다면 우리는 더욱 밝은 빛을 만날 수 있는 법이다. 이제 코리아 드림도, K드라마 드림도 새로운 세상을 위해 진짜 눈을 떠야 한다. 밝은 빛이 더 밝은 빛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것보다 더 예술적인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