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
새얀은 뭄바톤 리듬을 즐기지 못했다. 거대한 스피커 옆에 굳이 자리를 잡은 채, 후드를 덮어쓰고 소음을 막았다.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클럽 안 얼굴들과, 발을 보았다. 그리고 어지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 하나를 꺼내기에 적절한 때였다. 라이터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난 뒤였다.
그 후 새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사람의 등을 툭툭 쳤다. 담배에 손을 가까이 하며 불을 붙이는 시늉도 하였다.
다만 상대의 얼빠진 응시가 문제였다. 새얀은 답답한 듯 크게 말했다.
라이터요, 라이터!
남자는 깨달은 듯 입을 벌렸다. 새얀은 그런 표정변화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없어요.
새얀은 미련 없이 남자를 잊고 자리로 돌아가려했다. 뭄바톤 리듬을 규칙적으로 배출하는 검은 통 옆으로. 심지어 담배연기도 진동에 의해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곳.
저기요.
남자 옆 진한 화장의 여자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여자는 무심한 얼굴의 새얀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담배에는 불이 붙었다.
혼자 왔어요?
네.
왜요?
새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신경 쓰지 않고 아까 그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둘이 왔는데, 같이 놀래요?
새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여자는 자신의 이름이 윤진이라 하였다. 담배 없는 남자는 윤진의 친구였고, 너무 흔한 이름이었다. 민수. 새얀은 그 이름을 금방 까먹으며 또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민수는 언젠가 군대 선임한테 라이터를 건네받은 걸 기억해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새얀에게 내밀었다. 누나, 여기. 너무 작은 소리라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담배에 불은 붙었다. 새얀은 만족한 표정으로 연기를 뿜었다. 민수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는 동시에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이곳에 왜 혼자 왔나, 묻고 싶었다. 허나 묻는다 해도 민수는 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몰랐기에.
뭄바톤 리듬은 이제 질렸다. 외국힙합이 나오자 다들 흥이 올랐다. 새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두꺼운 후드티를 벗어던지고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칼과 민소매의 마른 몸을 드러냈다. 주인 잃은 후드티는 스피커 위로 옮겨졌다. 쿵, 쿵. 그것은 808 베이스 리듬에 맞춰 흔들렸고, 머리와 팔을 아래로 뻗었다. 어디 계세요, 주인님,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민수는 위태로운 그것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2
새얀은 충동적 성향을 안정적 수입으로 보완했다. 그녀는 라이프가드 일을 했다. 고급아파트 단지 내 물놀이장.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면 월 300이 들어왔다. 다른 동종업자들은 큰 수영장, 워터파크, 해변에서 고생했으나, 새얀은 얼굴이 뽀얀 부잣집 꼬마들 몇 명만 지키면 됐었다. 운 좋게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잡지 못했는가에 대해 새얀은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더웠다. 하루 5시간 뜨거운 햇빛 속에서, 새얀은 속까지 타들어갔다. 한때는 또래 친구들이 선망하는 하얀 피부를 가졌었지만, 어느새 그 누구도 원치 않을 피부색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챙 넓은 모자, 팔토시, 며칠 만에 다 써버리는 썬크림. 그녀도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왜 쟤네들은 안 탔지? 새얀은 얼굴 뽀얀 꼬마들을 보며 생각했다. 꼬마들은 성인 남성의 종아리쯤에나 올 수위의 물에서, 수준급의 실력으로 익사 직전의 모습을 연기했다. 양쪽 볼만 벌겋게 상기된 상태로.
누나, 나 봐라!
꼬마 하나가 정자 아래 그늘에 앉아 쉬는 새얀에게 소리쳤다. 꼬마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더니 잠수를 시작했다.
어머, 얘 좀 봐!
어디선가 불쑥 사모님 하나가 나타나 소리치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굽 높은 구두를 물 안에 넣진 않았지만, 고음의 목소리는 모성애 가득한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냈다.
새얀은 그 모습을 그늘 안에서 무심하게 쳐다봤다. 물에 젖은 아이의 손을 잡고 사모님이 성큼성큼 다가왔을 때도 똑같은 표정이었다.
지금 뭐해요? 아이가 더러운 물에 코 박고 있는데.
물 안 더러울 걸요. 엄청 깨끗하게 관리하던데.
아이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울한 얼굴로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됐고, 여기서 보면 보이긴 해요?
사모님은 고개를 돌려 물놀이장 쪽을 쳐다봤다. 새얀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수풀에 가려 물놀이장 절반이 보이지 않았다.
사모님은 더 따지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허나 새얀이 변함없는 얼굴로 수풀 쪽을 지켜보고 있어 김이 샜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나 이거 얘기해야겠다.
사모님은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그들에게서 말소리가 들렸다.
엄마. 저 누나 원래 맨날 여기 있어. 잠깐 저기 앉은 거야.
몰라. 빨리 가자.
새얀은 그들이 물놀이장을 나간 뒤 곧바로 땡볕으로 나왔다. 아직 꽤 많은 아이들이 소리치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방금 전 모자가 나갔던 출입구를 통해 들어온 듯 했다. 남자 역시 하얬다. 그의 흰색 반팔 티셔츠와 제모된 종아리만큼.
혹시 어떤 아줌마 못 봤어요? 굽 높은 구두 신고 목소리 높은 사람.
아. 방금 나갔는데.
정중하게 묻던 남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씨. 엇갈렸네.
집에 계시지 않을까요.
네. 근데 어느 집인지 몰라서.
네?
남자는 되레 자기가 놀라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집이 여러 개예요.
여러 채?
네. 오해하지 마세요. 자랑할 건 아닌데.
오해 안 해요.
남자는 새얀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응시했다. 새얀의 손도 살짝 쳐다봤다. 마지막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피부색을 비교하기라도 하듯.
교대 언제 해요?
교대 없어요.
아. 언제 끝나요?
5시요.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얀은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3
새얀아, 신새얀. 너무 걱정 마. 그렇게 심한 건 아니야. 당분간 말을 못 타는 것뿐이지.
호화로운 1인실 침대 위. 물놀이장에서 만난 피부색이 하얀 남자가, 멋진 푸른 하늘이 가득 담긴 창문을 등지고 있었다. 그가 책상에 놓인 사진을 유심히 보는 새얀에게 말했다.
새얀은 액자를 내려놓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흰 환자복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과 다리의 깁스는 패션일 뿐이다, 하는 얼굴로.
와 줘서 고마워.
남자는 침대 바깥으로 다리를 내렸다. 새얀은 또 한 번 사진을 들었다. 사진 속 남자는 승마복을 입고 메달을 목에 건 채, 우람한 말 옆에서 브이를 하고 있었다. 새얀은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떤 미소가 더 행복해 보이는지 궁금해서였다. 사진 안? 침대 위?
오빠. 이 말, 왜 내 이름을 땄어? 신새얀, 신세계. 신새얀, 신세계. 근데 ‘신’자 말고 다 다르네.
남자는 잠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허나 미소는 금방 돌아왔다.
네가 원했잖아. 까먹었어? 하긴, 벌써 3년이 다 돼간다.
질문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으나, 새얀은 상관없었다. 그녀는 잠깐 침묵 후에 말했다.
오빠 이름을 따지 그랬어. 승규헌.
내 이름도 멋있지. 근데 신세계가 나아.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규헌은 발을 조금씩 흔들며 멍하니 바닥을 지켜봤다. 새얀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보았다.
세계가 걱정 돼. 운동을 좀 시켜야 하는데. 해줄 사람이 없어.
말을 마치고 규헌은 새얀을 보았다. 그의 검은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나?
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잖아. 나는 잘 못 타.
아냐. 넌 소질이 있어. 딱 3일만 해줘.
관리인 아저씨도 있잖아.
아저씨가 마침 휴가야.
새얀은 가느다란 팔을 엇갈리게 하여 팔짱을 꼈다.
좋아. 언제.
다음 주 수요일부터 금요일.
세계 데리고 승마장 밖으로 나가도 돼? 그게 제일 중요해.
규헌은 새얀의 욕구하는 눈이 좋았다. 그는 필요한 게 있으면 커지는 동공을 사랑했다. 그게 새얀의 것이면 더더욱.
음. 어느 정도 가능해.
근데 안 돼. 약속이 있어.
윤진 씨?
새얀은 팔짱을 풀었다. 몸은 좀 더 규헌 쪽으로 했다.
어떻게 알았어?
너 주변에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하긴.
어쨌든, 진짜 안 돼?
새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규헌은 계속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집에 윤진 씨도 데리고 와. 그리고 거기서 실컷 놀아. 아줌마가 맛있는 거 해줄 거야. 술도 있고.
새얀은 표정변화가 없었다. 규헌은 익숙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2박 3일 동안, 우리 집인 것 마냥?
말이 좀 그렇다. 맞아.
규헌은 사람 좋은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마침 나 퇴원 날이야. 그때 크게 파티 한 번 하자. 어때?
파티?
응. 승낙한 걸로 알게.
새얀은 머리칼을 목뒤로 쓸어 넘겼다. 그녀의 시선은 규헌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는 분노, 또 누군가는 연민이라 해석했을만한 다의적인 눈빛. 규헌은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절뚝이며 문을 연 뒤 손짓했다.
나가서 복도 맨 끝에 가봐. 기사 아저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내가 얘기했다고.
새얀은 무표정으로, 마치 은행에서 자신의 번호가 불렸을 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뒤돌아 말했다.
아직도 포르쉐?
응. 그것도 바꿔야 돼. 22살에 샀는데, 벌써 3년이나 됐네.
바꾸면 얘기해.
응?
새얀은 어리둥절한 규헌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동시에 복도에서는 바람이 불어와, 마중 나온 규헌의 얼굴 위로 새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하늘거렸다. 규헌은 살짝 눈을 찌푸리고, 새얀의 뒷모습을 몇 초간 쳐다본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로 가는 길에, 크게 재채기를 하더니, 히죽 웃었다.
4
돌길에 타이어가 쓸리는 소리를 내며 구형 그랜저가 새얀 앞에 섰다. 새얀은 썬팅이 덜 된 덕에 탑승자들을 쉽게 알아보았다. 윤진과 민수였다.
새얀아, 타!
담배 없는 남자, 민수는 묵묵히 전방을 주시하는 척 새얀의 반응을 살폈다.
아 이거, 안에서 열어줘야 한다.
윤진이 낑낑대며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새얀은 뒷좌석에 몸을 던지듯이 앉았다.
아휴, 이 똥차. 얘들아, 우리 어디갈래? 드라이브?
민수가 눈알을 굴리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고, 새얀은 그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뭔 드라이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밥? 너가 낼 거냐?
내가 내지 뭐.
그럼 가야지. 새얀아, 괜찮아?
좋지.
민수는 거울로 새얀의 반응을 살피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민수는 스테이크를 다 썰어놓고 리조또와 파스타에 정신 팔린 여자들에게 손짓했다. 다 잘라놨으니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그는 새얀이 스테이크 한 조각을 집어 들자 한마디 했다.
누나, 설마 제 이름 모르는 거 아니죠? 그래도 몇 번 봤는데.
음.
고민수요, 저.
술 취했나, 왜 그래?
윤진은 민수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민수는 안 취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지 손을 척 들어 올려 윤진의 얼굴을 향해 내밀었다.
민수. 그래. 미안하네, 이제 알아서.
새얀은 스테이크 한 조각을 또 집어 들었다. 절대 까먹을 수가 없는 이름인데, 꽤 오랫동안 질겅거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미안한 듯 불쑥 핸드폰을 꺼내 민수에게 내밀었다.
민수야. 너 번호 좀 찍어봐. 아직 번호도 없었네.
윤진은 옆에서 벌어지는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사진을 안 찍고 음식을 몇 움큼 퍼먹었다는 사실에 자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민수는 오른손으로 새얀의 핸드폰을 받았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받친 상태였다. 새얀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손을 보고 말았으며, 그때 생각했다. 저 떨리는 손이 유리잔을 떨어트리면 어떡하지. 잔은 깨질 거고,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온갖 짜증을 내며 치우러 올 거야. 그럼 밥맛이 떨어지겠지.
누나, 다음 주 금요일에 뭐해요?
그거 물어봐서 뭐하게? 어차피 그때 너 군대에 있잖아.
윤진이 불쑥 끼어들어 민수를 나무랐다.
군대에는, 외박이란 게 있어.
나 그날 안 돼.
새얀은 포크로 파스타를 천천히 말며 말했다. 민수는 슬픈 얼굴로 포크가 돌아가는 걸 지켜보았다.
말 나온 김에. 윤진아. 그날 계획 좀 바꿀래?
아 맞다. 그날 우리 둘이 놀기로 했지. 어떻게 바꾸게?
민수와 새얀은 동시에 윤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파스타 몇 가닥을 입에 밀어 넣고 있는 중이었다.
응. 규헌 오빠가 놀러오라네. 파티하자고.
규헌 오빠?
윤진은 말과 동시에 물고 있던 파스타 몇 가닥을 이빨로 끊었다. 파스타 조각은 부리나케 그녀의 입술에서 달아났다.
규헌 오빠가 왜?
그냥, 파티하자고.
그냥 파티?
민수는 윤진의 과한 반응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윤진을 다른 남자와 팔짱 끼는 애인 보듯이 바라보았다.
나도 가요 그럼.
응?
안돼요? 파티 뭐, 다 같이 즐기는 아니에요? 영화 보면, 파티 한다 하면 다 들어가던데 그냥.
윤진이 민수의 어깨를 후려치며 말했다.
초대를 받아야지. 멍청아.
데리고 가지, 뭐.
새얀의 말에 윤진은 몸을 홱 돌렸다. 그녀의 팔에 유리잔이 조금 스쳤고, 그것은 넘어질 듯이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그게 뭔 소리야, 새얀! 민폐야, 민폐.
별로 신경 안 쓸 거야, 그 오빠.
새얀의 말을 들은 윤진은 아직까지 흔들리던 유리잔을 탁 부여잡더니 막걸리처럼 들이켰다.
한편 민수는 꽉 쥔 주먹을 테이블 밑에서 흔들어댔다. 얼굴은 진지하게 유지하고, 새얀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녀가 보고 있단 것도 모른 채.
이에 새얀은 생각했다. 신나게 움직이는 팔을 못 따라가서 얼굴은 참 힘들겠다.
5
새얀은 울타리 위에 걸터앉아 초원을 바라보았다. 균일하게 잘린 풀들이 단체로 몸을 흔들었다. 양 몇 마리가 거닐고, 저 멀리 나무들이 보였다.
등 뒤로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말이 내뿜는 콧김 소리도 들렸다. 새얀은 가까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있진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뒤에, 윤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삐를 손에 쥐고 말 옆에 서있었다. 민수 역시 그녀와 함께였다. 그는 말과 조금 떨어져 있어, 누가 봐도 말을 끌고 오는데 그 어떤 도움도 안 줬을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지 잘 끌고 왔네. 세계야, 기다려.
세계?
신세계. 말 이름이야.
이름 웃기네. 나 사진 좀 찍어주라.
윤진은 새얀에게 폰을 건네고 볼에 검지를 찔러 넣으며 포즈를 취했다. 말은 콧김을 내뿜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민수는 카메라 렌즈를 피해 몸을 숨겼다.
촬영을 끝낸 윤진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넘겼다. 그동안 새얀은 보호 장구를 입었고, 부잣집 딸내미의 외피를 가지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헬멧으로 인해 더욱 작아보였다.
말은 또 콧김을 내뿜더니 꼬리를 흔들며 기다렸다. 새얀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민수는 믿기지 않는 듯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미쳤나 봐. 내가 찍어줄게!
윤진은 카메라 렌즈를 새얀에게로 돌렸다. 새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몸은 부드럽게 말 위로 안착했다. 말은 그녀가 오른 것도 모르는 듯 태평해보였다.
새얀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고삐를 살짝 당겼고 말은 움찔거렸다. 말머리는 민수를 향했고, 그동안 꼬리만 흔들었던 말은 드디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였다. 그만큼 민수는 뒷걸음쳤다. 느긋한 움직이었지만 충분한 위협이었기에, 민수는 약간의 원망이 섞인 얼굴로 새얀을 올려다보았다.
새얀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민수는 계속해서 뒤로 움직이며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새얀이 어딜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차 싶은 듯 옆으로 비켜섰고, 전진하는 새얀과 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예쁘다.
민수는 말갈기가 초원의 풀들과 거의 비슷한 리듬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새얀은 지는 해를 향해 나아갔고, 세 개의 렌즈―민수의 두 눈과 윤진의 카메라 렌즈―가 그녀를 담으려고 애썼다. 프레임 안의 피사체는 점차 작아졌다.
누나, 어디가요! 집은 이쪽인데!
새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계의 옆구리에 달라붙은 두 다리가 더 중요했다. 그녀는 하체의 감각이 점점 둔해지는 것을 느꼈고, 언젠가 만화에서 보았던 걸 떠올렸다. 이름이 켄타우로스였던가. 너무 갑작스레 떠올라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는 천천히 네 다리로 걸었다. 그리고 인간의 피를 가졌지만 인간이 아닌 이종족의 역사를 상상했다. 켄타우로스,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 그런데 왜 신이 되지 못했는가?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낱 인간인 민수가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6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아래. 식탁 위의 만찬을 중심으로 손들이 모여들었다. 새얀은 오물오물하는 입을 오른손 끝으로 가리며 윤진에게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음.
새얀이 건네받은 것은 사진첩이었다. 초원 위를 아장아장 걷는 아기 규헌, 아버지와 함께 말에 올라 탄 어린이 규헌, 메달을 목에 걸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청소년 규헌. 새얀은 그것들을 보며 단지 음, 이라고 말했다. 씹고 있던 음식물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릴 땐 귀여우셨네요.
그럼 지금은 안 귀엽다는 거예요?
윤진의 말에 규헌이 웃으며 받아쳤다. 윤진의 귀가 붉어졌고, 그녀는 머리칼을 뒤로 넘겨 새빨개진 귀를 더욱 노출시켰다.
지금은 다른 매력이 있는 거죠.
어떤 매력?
그건 모르죠!
규헌은 피식 웃었다. 윤진은 입을 가리고 웃더니, 소주잔을 들어올렸다. 규헌, 윤진, 새얀, 민수. 총 네 개의 잔이 부딪혔다. 민수의 잔만이 늦게 부딪혔고, 새얀의 손가락에 부딪혀 짠 소리도 내지 못했다.
어우 써.
규헌이 얼굴을 찡그리며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이에 윤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벌써 얼굴이 빨개졌어요, 오빠.
그래요? 제가 소주는 잘 안 먹다보니.
아아 네. 위스키나 와인 드셔야 되는데, 어떡해요?
윤진은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규헌은 두 손을 내밀어 휘휘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윤진은 계속 웃었다. 그녀의 두 손은 규헌의 어깨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민수는 경멸스런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대놓고 노려보진 않았다. 그는 컵을 들어 물을 마셨고, 이 상황에 대한 새얀의 반응이 궁금한지 눈알을 굴려 그녀를 보았다.
새얀 역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민수는 이를 보고 사례가 들렸다.
큰 눈, 검은 동공. 새얀의 검은자가 그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7
민수가 대자로 뻗어 있는 넓은 방, 전시된 트로피와 메달들을 보았을 때 원래 주인은 규헌. 창 너머로 세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규헌, 윤진, 그리고 새얀. 그들은 테라스에서 수다를 떨었고, 그 누구도 건너편의 민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후 전화벨이 울렸고, 새얀을 제외한 두 사람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원인은 규헌이었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벨소리를 무음으로 만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고 계세요.
민수는 규헌이 나가는 소리를 들었는지 끙끙대며 뒤척였고, 그 모습을 본 윤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윤진의 담배연기는 달을 향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새얀은 그 형체를 눈으로 쫓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공중에 떠다니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왜 그래 진짜.
윤진이 말했다. 그녀는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낭만이다.
풀린 눈의 윤진이, 역시 풀린 눈의 새얀에게 말했다. 새얀은 난간 너머 초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분 좋은 침묵의 시발점이었다. 침묵은 윤진을 잠재우고 새얀을 몽롱하게 만들었으며, 불청객이 나타나기 전까지 지속됐다.
불청객 민수는 원래 규헌이 앉아있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혀가 꼬인 상태로 새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 솔직히 그동안 많이 서운했어요.
새얀은 민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난간 너머 초원을 향해 있었다. 밤이 깊어 검게 물든 초원은 아름다웠다.
민수는 계속해서 서운한 점을 말했다. 정확히는 궁시렁댔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왜 몰라주는가, 아니 왜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가. 대충 그런 내용. 새얀에게 민수의 말은 어느새 한여름 밤의 에어컨처럼 익숙한 소음이 되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작게 웅웅거렸고, 풀벌레 소리와 잠든 윤진의 숨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소리가 멈췄다. 새얀이 할 말이 생각났기에.
그거 아니, 민수야?
민수는 놀랐다. 벌린 입의 크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내가 어릴 때 말야. 지금도 어리긴 한데. 그래, 정확히 10대 때. 아니 어쩌면 20살, 21살 때까지. 난 항상 별 거 아닌 거에 상처받았어. 정작 힘들어야 할 때는 아무렇지 않고 말이야. 말이 돼? 내가 무너진 건 정말 작은 이유 때문인 것 같아.
무슨 소리예요. 누나?
민수는 약간 술이 깬 듯 전보다 명확해진 발음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새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풀벌레 소리와 새근새근한 윤진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누나.
너무도 또렷한 발음이었다. 새얀의 귀에 민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승규헌 그 새끼랑 무슨 사이예요?
규헌 오빠?
네.
전남친.
민수는 마음의 동요를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말처럼 콧김을 내뿜고 난간을 턱 붙잡으며 새얀에게 더욱 몸을 기울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오빠가 고백하고, 오빠가 헤어지자 했어. 관심사가 너무 다르대. 세계관이 다르다 했던가.
나쁜 새끼.
왜?
아니에요.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누나.
응?
저는요, 그런 거 안 물어봐요. 그 새끼랑 잤는지 안 잤는지, 뭐 그런 찌질한 거요.
그렇구나.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잤어요?
응.
정적이 오랫동안 찾아왔다. 민수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좌우로 돌리더니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새얀의 시선을 모방했다. 어둠에 잠긴 초원이 보였다.
잠시 후 새얀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아냐.
민수는 대답하지 않고 전방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느 날 손소독제를 봤는데, 그걸 세 네 번 짜가지고 내 입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왜 그랬을까? 술이 생각나서 일까?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내가 무너진 거야.
민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새얀을 쳐다보았다. 그는 할 말을 애써 만들려는 듯 입을 옴짝달싹 거렸다.
새얀은 초원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너는 내 얘기를 해줘도 듣지를 않네.
순간 민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술은 어느새 완전히 깬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나운 눈빛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누나도 내 얘기를 듣지 않잖아요.
새얀은 눈을 감았다. 민수의 언성이 높아졌다.
누나도 내 얘기를 듣지 않잖아요.
새얀은 눈을 질끈 감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민수는 고함을 질렀다.
너도 내 얘기를 듣지 않잖아!
민수는 눈을 감은 두 여자를 뒤로 한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8
이거 뭐야!
새얀과 윤진은 비명소리에 잠이 깼다. 그들은 밤이 그리 어둡지 않다는 것에 놀랐다. 예기치 못한 빛이 그동안 천천히 어둠을 몰아냈던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공기도 덥혔다. 새얀은 난간에 손이 데일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강렬한 빛의 원인은 화재였고, 말들이 있는 마사가 불타고 있었다. 그동안 새얀이 운동시킨 신세계도 그 안에 있을 터였다. 윤진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호들갑을 떨었다. 테라스 쪽으로 스멀스멀 다가오는 검은 연기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전부였지만.
규헌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뛰쳐나왔다. 규헌은 그들 중심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불은 물을 퍼부어도 커져만 갔고, 규헌의 집에 옮겨 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저기!
윤진은 마사에서 멀리 떨어진 초원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사람의 형체가 어느 정도 확실히 보였다. 새얀이 눈을 찌푸려 더욱 자세히 보니, 민수였다. 그는 기름통을 들고, 불타는 마사를 등진 채로 초원의 살짝 위로 솟은 부분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집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고, 왜인지 오싹해진 새얀은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갈기에 불이 붙은 신세계가 마사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물을 찾으려는 듯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비켜섰다.
도와줘야 해!
평소 듣지 못한 새얀의 격정적인 목소리에 윤진이 놀라 반응했다.
야 신새얀! 미쳤어? 위험해!
새얀은 윤진의 손길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처음으로 마주친 건 규헌이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새얀이 마사로 향한 게 아니란 걸 몰랐던 것이다. 곧이어 검은 연기가 그와 새얀의 사이를 갈랐다. 새얀의 귓가에는 어디 가, 하는 찢어진 목소리만 들렸다.
새얀은 계속 달렸다. 그녀는 신세계의 뒷꽁무니, 아직 불이 번지지 않은 엉덩이를 쫓아가며 눈물을 흘렸다. 말은 느렸다.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새얀의 눈은 더욱 붉어졌다. 눈물 때문인지, 연기 때문인지, 말갈기의 불 때문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새얀은 짧은 시간 동안 그 모든 것이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신세계는 지쳐 쓰러졌다. 새얀은 균일한 풀들 아래 흙들을 파내 말의 등에 끼얹었다. 손톱 아래 흙 알갱이가 박히고, 돌에 긁혀 손등에 상처가 났다.
그럼에도 살 타는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소용없어요.
어느새 민수가 다가왔다. 여전히 기름통을 들고, 멍한 눈빛이었다. 그는 새얀과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불타는 말을 함께 지켜보았다.
새얀은 흙을 털고 일어섰다. 꼿꼿한 자세였다.
신세계가 죽었어. 너 때문에.
알아요. 저 때문에.
민수는 멍한 얼굴로 일어서 뒤돌았다. 규헌의 집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 보였다. 민수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변화를 드러내지 않았고,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다. 새얀은 가만히 다리를 땅에 고정시킨 채, 그가 속도를 붙여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규헌집 사람들은 모두 집 앞으로 이동해 불을 끄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테라스에서 뛰어내릴까 말까 고민하는 윤진의 모습도 보였다.
새얀 말고 그 누구도 민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범인은 딱 봐도 의심스런 모습으로, 기름통을 든 채 가만히 서서 불타는 마사를 지켜보았다.
야 이 씨발 놈아!
새얀의 입에서 욕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울분을 터뜨렸다. 근래 몇 년 동안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던 침 뭉텅이가 분노와 함께 밖으로 튀어 잡초들을 적셨다.
왜 죽인 건데!
민수는 그럼에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새얀은 어깨를 들썩이며 화를 삭였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새얀의 눈물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눈물 한 방울이 초원 위에 떨어지자마자 민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했다.
사랑해요.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새얀은 그의 입모양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뜻을 정확히 알아차렸다. 그래서 엉엉 울면서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그녀의 답을 들은 민수는 기름통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후 불타는 마사 안으로,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불은 그를 서서히 잡아먹었다.
민수가 사라진 자리에 새얀은 무릎을 꿇고 떨어졌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윤진과 규헌을 포함한 그 누구도 견디지 못할 괴로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새얀은, 고개를 들어 평온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큰 눈, 검은 동공. 잃어버린 세계의 조각들이 다시 깃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