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가 사는 곳 3

단편소설

by 김솔한

02화 끼리가 사는 곳 2 (이전 챕터)


가파른 경사 위에 수놓인 흙색 계단은 소년들의 발아래서 더욱 더 심하게 갈라졌다. 하나 둘 흙가루가 쌓이고, 흙더미의 양은 탑까지의 거리와 반비례했다. 우뚝 선 십자 모양의 구조물은 소년들을 가엾게 내려다보았다.

형 이것 봐.

탑 주위에는 벤치와 망원경들이 있었다. 과거 북한 땅을 보는 용도였을 터. 정빈은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구경하더니 렌즈에 눈을 꽂다시피 했다. 시야에 작은 숲, 메마른 대지, 호수, 폐쇄된 군 기지, 산 아래 마을들이 골고루 들어왔고, 희성 역시 잠깐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쉬운 듯 눈을 뗐다. 끼리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도.

놀러 왔니?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두 소년은 뒤를 돌았다. 흙이 묻은 바람막이를 입고 손에 기름통을 든, 걸걸한 목소리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30대 중후반의 여인이 서있었다. 두 소년이 올라온 입구와는 다른 쪽으로 올라온 듯했다.

네.

벙찐 정빈 대신 희성이 답했다. 그러자 여인은 손짓하며 말했다.

가자. 안내해줄게.

세 사람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주위로 잘 정돈된 풀들이 보였다. 예초기로 관리한 모양새였는데,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이유 없이 박혀있는 연녹색 울타리와 돌담 조각들. 그것들을 따라 좁은 콘크리트길을 걷다 보면 쇠창살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좀 더 넓어진 콘크리트길 아래로 ‘통일기념관’ 글자가 박힌 건물이 보였다. 입구 건너편에는 오래된 보급품 몇 개를 전시해둔 대피호도 있었다. 관리인은 여자 혼자인 듯 했으나 보존상태가 좋았다.

여행 왔니?

소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나 좀 도와줄래.

여자는 기름통을 내려놓고 기념관과 대피호 사이 녹색 반투명 지붕 아래 개방형 창고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는 목장갑 두 개와 호스, 거기다 기름통 두 개를 더 들고 와 드럼통 옆에 내려다 놓았다.

와 봐.

두 소년은 군말 없이 여자를 따랐다. 여자는 직접 시범을 보이며 사이펀의 작동 원리를 설명해주었다. 작은 기름통과 드럼통을 호스로 연결하고, 펌프만 눌러주면 드럼통 안 기름을 옮길 수 있었다. 여자는 기름이 새지 않게 조심하고, 꽉 찬 기름통을 자신에게 전해 달라 부탁했다. 두 소년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너희들, 와수리에서 왔구나.

네.

그냥, 도시 애들이면 이런 건 안 할 줄 알았어.

네.

아직도 이런 걸 쓰나요?

정빈의 질문에 여자는 거대한 유류탱크를 가리켰다.

어. 너희들이 내게 기름통을 전해주면, 내가 다시 저기에 넣을 거야. 저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여기서 사시나요?

맞아.

여자는 목장갑을 착용하고 유류탱크로 향했다. 그녀는 허리쯤 오는 돌담을 밟고 올라가, 유류탱크의 튀어나온 부분을 발판 삼아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작은 뚜껑을 열어 옆에 두고 기다렸다. 첫 번째 기름통은 여자가 설명하며 제대로 끼워놨기에 채우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희성은 다 채운 기름통을 유류탱크 위로 전달했다. 꽤 많은 양이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기름통 역시 순조롭게 채워졌고 정빈이 그것을 여자에게 전달했다. 허나 세 번째 기름통을 채울 때, 호스를 통해 기름이 잘 이동하나 싶더니 툭 끊겼다.

왜 그래?

드럼통에 기름이 다 떨어진 모양인데요.

벌써? 기울여봐.

두 사람은 드럼통을 잡고 기울였다. 꽤 무거웠다. 기름은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정빈이 기울이려 힘을 쓰는 동안 호스를 살짝 쳐버린 탓인지, 기름이 살짝 새어 드럼통 윗부분에 고이는 것이 보였다.

잠깐 내려 봐. 다시 끼워야 될 것 같은데.

내가 해볼게.

정빈은 호스를 잡고 드럼통 구멍에서 뺀 후 다시 끼웠다.

뭔가 이상한데.

됐어. 다시 기울여 봐.

희성은 미심쩍지만 다시 정빈과 함께 드럼통을 기울였다. 호스가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고래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처럼 기름이 솟구쳤다. 공교롭게도 기름벼락은 오로지 정빈만 맞았다.

아이씨, 냄새!

희성은 정빈을 보며 웃었다. 여자는 유류탱크에서 내려오며 혀를 끌끌 찼다.


걸어간다고?

예.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고?

예.

미친 짓이야.

그니까요.

정빈이 젖은 머리를 털며 화장실에서 나와, 좁은 식탁에서 담소를 나누던 여자와 희성 사이에 앉았다. 정빈은 출발할 때 입었던 옷과 다른 것을 입고 있었다.

사이즈는 맞니.

예. 누구 거죠.

남편 거야.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죽었어.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여자는 전쟁 때 죽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분위기를 풀려는 듯 새로운 대화주제를 꺼냈다.

성오산이랑 DMZ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만 안다고.

네.

그러면 더 찾기 힘들 텐데. 통일되고 그쪽에 마을이 더 생겼어.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언제 생긴 마을인지 물어봐야겠군요.

귀찮지만 좋은 방법이지. 다른 단서는 없어?

희성은 잠시 고민했다.

끼리에 대해 아세요?

끼리?

예.

글쎄.

여자는 지도를 꺼냈다.

여기 봐. 여기서 쭉 서쪽으로 걸으면 통문이란 말이야. 통문 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아랑 삼거리까지 가. 그리고 동쪽으로 쭉 마을들 하나씩 훑어보는 거지. 절구숲 보이지? 여기가 성오산 끝자락이니까 여기는 넘어가지 말고.

버스는 안 탈 거예요.

여자는 못 믿겠다는 듯 희성을 쳐다보았다.

돈을 아껴야 해요.

그리고 희성은 지도를 짚었다.

제가 알기로는 여기 기념관 좌측에 가다보면 작은 쪽문이 하나 있는데, 그 쪽문 너머 길이 옛날 군인들이 쓰던 수색로라 바로 성오산으로 향한다 하더군요.

그 쪽문이 정확히 어딨는데?

희성은 입은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빈은 묵묵히 형을 기다렸다.

너 대책이 참 없구나.

예.

수색로는 너무 위험해. 이제 풀이 무성해서 길인지 구분도 안 갈걸.

그렇군요.

차라리…….

여자는 말을 하다 멈췄다. 소년은 먹이를 기다리는 어미새 앞 새끼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내가 말린다 해서 안 갈 놈들 같진 않아. 그래도 말해주기가 꺼려져.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기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아. 통일이 되고 5년도 안돼 발길이 끊겼지. 그런데 최근에 군인들이 왔어. 모두 다 남쪽 사투리를 쓰더군. 놀러온 척 너스레를 떨었지만 난 다 보였어. 그들은 북쪽을 감시하러 온 거야. 비록 여기가 지금은 박물관이지만 예전엔 군사기지였으니 감시하긴 딱 좋았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인민해방전선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있어.

뭐요?

백두혈통을 따르는 놈들. 너희들 유튜브도 안 보니?

청소년은 사용 금지인 걸요.

몰래도 안 봐?

예.

순진하군. 어쨌든, 그놈들이 여기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 난 그래서……걱정이 된다. 내 혀가 니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건 아닐지.

여자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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