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V 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비슷한 시간대의 협찬(PPL) 팔이 생활정보 프로그램보다는 훨씬 유익하다는 생각도 들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삶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들이 인간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약육강식만 존재한다는 동물들의 세계에는 먹고 먹히는 관계뿐만 아니라 아주 소수이지만 공생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는 동물들을 보는 재미가 있는 훌륭한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삶 자체를 정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점점 낮아지는 현실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과 비슷한 처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관계는 인간들의 삶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갑과 을이라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되었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갑과 을이라는 암묵적인 사회계급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자영업이든 월급쟁이를 하든 만들어지는 모든 일의 결과는 항상 계약이라는 준비과정을 거쳐서 작성되는 문서로 결정이 된다.
그 문서의 제일 첫 문장은 갑과 을이라는 단어로 시작이 되고 갑은 보통 일감을 나눠주는 회사를 지칭하고 그 회사로부터 일감을 받아 납품을 하는 회사를 을이라 표현을 한다.
서로의 비즈니스에 도움을 주는 공생관계 여야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갑과 을이라는 이 구조는 정글 속의 먹이사슬과 비슷한 구조로 변화되어 최상위 포식자에게 잘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회사 대 회사의 관계는 법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러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만 일반 자영업자의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나도 프랜차이즈 회사와 계약을 맺고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작은 자영업자이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프랜차이즈 회사와 계약을 맺고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면이 많다.
물론 나는 을이 되고 프랜차이즈 본사는 갑이 되는 계약 조건이다.
오랜 기간 동안 쌓아온 영업 경험을 그대로 전수해 주고 필요로 하는 제품을 시간에 맞춰 배달까지 해주는 물류 기능까지 완벽하게 지원을 해주는 시스템이니 을이라는 입장이지만 본사의 기능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만약 내가 발로 직접 뛰면서 모든 재료를 구매해야 한다면 시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품질이 검증된 재료를 찾기도 쉽지 않아 가게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눈높이와 기대 욕구를 채우기 쉽지도 않고 맛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초보 사장들에겐 프랜차이즈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사업을 이어가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대부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갑과 을로 명시된 계약서는 위반 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경우가 많아 억울함을 풀기 위해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가끔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다행히 내가 계약한 곳은 갑과 을의 관계라기보다는 자영업자의 상황을 최대한 이해해 주려는 곳이어서 특별히 불만이 없었고 다른 프랜차이즈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계약 조항에 넣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진정한 공생 관계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본사도 점주들의 이익을 위해 공급 가격을 낮추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주고 있어서 고마운 마음을 늘 갖고 있다.
며칠 전 가게로 반가운 손님이 왔는데 40대 초반에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하여 지금은 프랜차이즈 사업장 5곳을 운영하는 고향 선배였다.
“어이. 전 사장. 잘 지냈어?”
늘 환한 미소가 인상적이어서 고향에서는 하회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선배였다.
내가 사랑방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이름을 부르곤 했었는데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늘 나를 사장이라 불러준다.
“아이고… 형님. 오랜만입니다. 하하하.”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카톡으로 안부를 수시로 묻기도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연락하며 지내는 가까운 사이지만 방문을 하기 전에 연락을 먼저 하곤 했는데 오늘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 이에요?”
”지나가다 들렀지. 우선 시원한 생매주부터 한잔 줘라. 생맥주 맛은 전사장 가게가 최고야. 하하하. “
”맥주맛 좋다는 말을 하시니 좋네요. 헤헤헤. “
손님도 없는 시간이라 나는 선배와 함께 생맥주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난 후 긴 한숨을 쉬면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하… 여기는 본사가 갑질하고 그러는 거 없냐? 그리고 로열티는 몇 프로 주냐? 가맹비는 얼마고?”
“우리 본사는 아직까지 갑질하거나 부당한 것을 지시하거나 하는 건 없는 것 같고…그리고 로열티나 가맹비는 없어요. 그냥 물류 유통 마진 정도로 사업을 이어가는 것 같아요. “
“좋은 본사네. 다행이다. 요즘같이 경기 어려울 때는 본사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거지. 거기에다가 여러 가지 명목으로 떼가는 돈도 없으니 최고다. “
”뭔 일 있으셨나 봐요? “
”생맥 한잔 더 줘라. 속에서 천불이 난다. 불부터 꺼야지. “
화가 많이 난 듯한 선배의 이야기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나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시사 고발 프로에서나 본 듯한 내용의 일들이 내가 아는 주변인들에게도 벌어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전 사장. 내가 지금 5곳의 사업체를 운영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개업을 해서 계약 시점이 거의 비슷해. 그러다 보니 계약서의 조건을 이행해야 하는 시기가 겹쳐서 갑자기 큰돈이 들어가게 생겼어. 그런데 그 조건이 본사의 강제 조항이라 안 할 수도 없고 완전 빼박이라는 거지. 그래서 요즘 사업을 접을까 하는 고민까지도 하고 있어. “
하회탈이라는 별명은 온데간데없고 심각한 표정의 선배 모습은 처음이었다.
“2년에 한 번씩 교체를 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멀쩡한 것을 새로 교체해야 한다고 하고… 그것도 본사가 지정한 업체를 써야 하고…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아예 그런 조건이 없어요. 그래서 인수할 때도 편하게 계약서에 사인을 했어요.”
“천만다행이다. 나는 그래도 꽤 이름 있는 곳이랑 하다 보니 5군데 모두 비슷한 조건이야. 콘셉트가 바뀌었다고 멀쩡한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해야 하고 간판 및 기타 장식도 새로 바꿔 달아야 하고…5군데가 비슷한 시기에 겹치니까 들어가야 할 돈이 장난 아니야. “
“만약에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뻔하지. 계약 위반으로 가맹점 취소 통보가 제일 먼저 날아올 거고. 거기에 위약금이 어쩌고 저쩌고…에휴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
“아… 시사 프로그램에서 보던 내용들이네요?”
“그러니 말도 못 하고 속 태우는 점주들이 얼마나 많겠냐… 장사는 안되고 안 써도 될 돈을 써야 하고… 요즘엔 프랜차이즈를 왜 했나 후회된다.”
그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선배의 하소연을 함께 들어주는 것과 시원한 생맥주로 불난 속을 꺼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야 작은 평수의 가게이지만 선배는 훨씬 큰 평수이고 5곳 전체를 새롭게 인테리어와 장비교체를 하려면 꽤 큰 금액이 필요한 상황이고 갑자기 큰돈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답답해하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계약을 파기하자니 그동안 들어간 시간과 노력이 아깝고 이행하자니 갑자기 큰 목돈이 들어가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갑과 을의 계약관계라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되겠지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솔로몬의 지혜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영업자이지만 나도 갑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업체들의 경우가 을에 해당하지만 별도의 계약서를 맺고 진행하지는 않는다.
주류 도매상, 튀김 기름 공급 업체, 방역 업체…
이들은 워낙 경쟁업체가 많아 명함을 돌리는 영업사원들이 자주 가게를 방문한다.
주류 도매상을 바꾸시면 냉장고도 새로 교체해 드리고 한 달간 프로모션으로 금액 지원도 해드리고 튀김 기름 공급가격을 지금보다 낮춰 드리고 폐유 수거 금액은 지금 업체보다 얼마를 더 드리고 등의 솔깃한 제안을 많이 받는다.
눈앞의 이익만 좇는다면 언제든 교체가 가능한 갑의 위치이지만 살벌한 정글 속에서 작은 이익도 함께 나누고 상생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싶은 꿈이 나에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