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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와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by 전선훈

대학을 졸업한 후 첫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면접관이었던 임원들을 보며 언젠가는 저들의 위치를 넘어서는 자리에 올라가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직장생활을 했었고 실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남보다 빠르게 승진을 하며 승승장구했었고 이런 속도라면 내가 생각한 기간보다 더 빨리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늘 편하게 대하던 동기들도 나의 잠재적 경쟁자였고 후배와 선배들도 모두 경쟁자였기에 압도적인 퍼포먼스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시간이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엄청난 스트레스는 원형탈모가 생길 정도로 아주 강력하였지만 그럼에도 압박을 잘 견뎌내며 희망을 이어가던 때가 있었다.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야망이나 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높은 위치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본인만이 느끼는 의미와 깨달음 때문에 높은 위치에 오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면 모든 게 다 내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고생에 대한 보상은 충분하다고 판단되기에 온갖 수모를 참으며 직장생활을 하는 이유였다.


그런 꿈을 꾸며 성공을 위한 노력과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내가 오너가 아닌 이상 일인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결말을 다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면서 살기도 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가기를 반복하면서 사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중의 하나였지만 내려오고 나니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한결 마음의 여유도 생기는 희한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자유롭게 내 할 일을 하면서 욕심을 버리게 되었고 대접을 바랄 필요도 없으니 삶에 대한 행복감은 더 커져가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자영업의 루틴에 따라 손님맞이를 끝내고 재료를 준비하면서 느끼는 만석의 기대감이 매일 충족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주 찾는 단골들의 애환을 주방너머로 들을 땐 아픈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초강력 무더위가 엄습하여 숨 쉬는 것조차 힘든 날이 계속되던 날이었다.


날씨가 더워지면 생맥주 매출이 많이 오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밖으로 나오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습성 때문에 오히려 매출이 저조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빵빵 돌아가는 에어컨의 전기세 걱정에 일찍 문을 닫고 가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되어 마감을 끝내고 집으로 가려던 찰나에 자주 방문하던 노신사 한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아직 문 안 닫으셨죠? “


”네. 들어오세요. “


속마음은 영업 끝났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주 오는 단골손님이라 어쩔 수 없이 빈말이 나왔다.


“간단히 한잔 할 거니까 늘 먹던 안주하고 생맥주 한잔 주세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가게를 찾아와 한치에 맥주를 마시던 단골손님이지만 평소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늘 함께 오시던 분들은 안보이시고. 헤헤헤.”


“네. 그렇게 됐네요. “


기분이 별로인 듯한 느낌이 들어 괜한 말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맥주와 한치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손님이 나가기 전까지는 문을 닫을 수 없으니 기다리는 동안이라도 다른 손님이 들어오기를 기대했지만 상가 안은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썰렁한 상태라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사장님. 저 때문에 문도 못 닫고… 미안합니다.”


“별말씀을요. 괜찮으니 천천히 드세요. 헤헤헤.”


“괜찮으시면 제가 사장님한테 맥주 한잔 사고 싶은데…“


뜻밖의 제안에 놀랐지만 가끔 혼자 오는 손님들이 술 한잔 사겠다는 얘기를 가끔 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 답답한 속마음을 얘기하고 싶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경우여서 특별히 가게가 바쁘지 않으면 응하곤 했는데 오늘도 손님이 없으니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럴까요? 손님도 없는데…헤헤헤.”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하하.”


청소는 다 끝난 상태여서 집사람까지 기다리게 할 필요는 없었다.


“당신은 먼저 들어가셔. 내가 마무리하고 들어갈 테니.”


“그럴까? 일찍 들어가 쉬어야겠네. 호호호. “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지 않기 위해 바깥쪽 간판의 불을 끄고 맥주 한잔을 따라 노신사가 앉은 테에블에 앉았다.


“괜히 저 때문에 일찍 못 가시네요.”


“괜찮아요. 덕분에 저도 편히 한잔 하니 좋네요. 헤헤헤.”


”편하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하하. 한잔 하시죠. “


시원하게 한잔 마시고 난 후 노신사는 조용히 얘기를 이어나갔다.


“늘 함께 오던 사람들이랑 안 와서 궁금하셨죠?”


“네. 사실은 좀 이상하다 느꼈습니다. 매번 함께 오시던 분들이 안 오셔서…”


“이제는 그 친구들하고 술 먹으러 오는 일 없을 겁니다. “


”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


”괘씸한 놈들이에요. 내가 힘이 떨어지니까 바로 등을 돌리고…에휴. “


노신사는 화가 많이 난 듯 거침없이 한잔을 마시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얼마 전까지 중견기업의 대표이사를 지냈던 사람입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이곳에 왔었던 친구들은 내 밑에 있던 임원들이었어요. 내가 아끼던 친구들이었는데… 휴…“


가끔씩 술 먹으러 와서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노신사의 신분이 현직 임원정도 되는 줄 알고 있었고 어떤 회사인지는 몰랐었다.


늘 형님 동생 혹은 아우라고 호칭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화가 잔뜩 나있는 걸 보니 대략 어떤 상황인지 예상은 되었다.


“내가 꽤 오랜 시간 동안 대표이사 자리에 있으면서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주변엔 예스맨들 밖에 없었던 것 같고. 휴…”


“아무래도 대표이사로 재직을 하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죠. 웬만하면 실세인 대표이사의 눈 밖에 날 일을 잘 안 하죠. 제가 근무하던 회사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예스맨들이 오래 버티더라고요. 하하하.”


“사장님 처음 봤을 때 자영업 오래 하신 분 같지는 않았었는데…무슨 일 하셨는지 물어도 실례가 안 될까요?”


“네. 저는 해외에서 오랜 시간 주재원으로 근무하다가 자영업 시작한 지는 2년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도 대표이사뿐만 아니라 오너 주변엔 항상 예스맨들이 포진되어 있어서 이견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었죠.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하하하.”


“퇴직 후 한동안은 연락도 하고 만나서 술도 한잔씩 하곤 했는데…3개월 지나니까 딱 끊어지네요. 현역 신분인 건 이해하지만 내가 그 놈들한테 해준 게 있는데… 요즘엔 그놈들한테 잘해준 게 후회가 됩니다. 휴. “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마음속 깊은 얘기를 다해서인지 표정이 조금씩 밝아 보였다.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속상했는데 사장님한테 얘기하고 나니 맘이 후련해지네요. 고맙습니다. 늙은이 얘기를 들어주셔서. 하하하. “


”기분이 좀 나아지셨다니 좋네요. 헤헤헤. “


”기분 좋게 마셨으니 이제 가야겠네요. 나 때문에 늦게 들어가게 해서 미안해요. “


”아닙니다. 다음에도 편하게 오셔서 드세요. 말상대 되어 드릴게요. 하하하. “


노신사는 고맙다는 말을 계속하더니 약간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현직에 있을 때와 퇴직 후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대접받으며 생활하던 때의 추억을 빨리 내려놓지 못하면 실망만 커질 뿐이고 우울증을 앓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대표이사의 위치에 있다가 내려온 경우에는 더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아 노신사가 퇴직의 아픔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높은 곳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은 더 높은 곳을 향하지만 내려오면 보이는 풍경이 비로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 생각되기에 노신사도 높은 곳에서 꿈꿨던 야망과 목표를 내려놓고 현실의 세계에 빠르게 적응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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