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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추억 여행

by 전선훈

춥다.


너무 추워서 눈이 저절로 떠졌다.


이불 동굴 안에서 시계를 쳐다보니 아직 이른 시간인데 밖은 벌써 밝아져 있었다.


눈이 내린 모양이다.


밖을 나가보니 엄청난 양의 눈이 밤새 내려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옥탑방에서 내려본 주변의 풍경은 마치 노천 온천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처럼 하얀 연기가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젠장… 보일러가 또 고장이 난 듯했다.


방안에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새해 첫날이라 일하는 수리공도 없고 …


차라리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윗방 총각… 일어났어요?” 집주인의 며느리가 방문을 두드리며 부른다.


“네. 일어났습니다. 들어오세요.”


“아니.. 방안이 왜 이리 썰렁해?”


“보일러가 또 말썽이네요. 밤새 떨면서 잠을 잔 것 같아요. 하하하.”


“오늘은 새해 첫날이라 수리공도 일 안 하는데… 어쩌지?”


“어쩔 수 없죠 뭐.. 내일 아주머니가 사람 불러서 좀 수리해 주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내려와서 떡국 먹자고 올라온 거야. 호호호. 보일러 수리는 내가 내일 하면 돼. 내려가서 함께 떡국 먹어요.”


“네. 씻고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보일러가 말썽이니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차디찬 물이라도 나오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고양이 세수만 하고 아래층 주인집으로 내려갔다.


계약할 때 내려가 본 곳이니 1년 만에 내려가 보는 주인집이었다.


온기가 집안 전체에 흐르고 맛있는 음식 냄새가 허기를 더 느끼게 해 줬다.


“어서 와요. 윗방 총각.”


주인집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 못하고 내려가서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아무 선물도 준비 못하고 왔네요.”


“선물은 무슨.. 새해 맞아서 함께 밥이나 한 그릇 먹자고 한 건데 뭐… 호호”


주인집 할머니의 인상은 시골에 계신 고모할머니 닮아서 가끔 일찍 퇴근할 때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서 가져다 드리곤 했었다.


푸근한 인상의 맘씨 좋은 시골 할머니 느낌 그대로였다.


준비한 음식이 하나 둘 나오고 아들 내외 그리고 손주와 함께 맛난 음식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시골 밥상 같은 느낌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하게 만들어진 음식에서 나오는 주인집 할머니의 손맛 내공이 장난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고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천천히 들어. 체하겠다. 호호호.”


주인집 할머니는 마치 자신의 손주 살피듯 이것저것 잘 챙겨주었고 오랜만에 시골집에 내려와 먹는 고향의 맛 그대로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잘 먹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차려준 밥 맛이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초대할 테니 가끔 집에 와서 함께 식사도 하고 그러면 좋겠네. 호호호.”


손주 녀석에게 용돈만 주고 감사 표시를 하였다. 냉기가 가득한 방으로 다시 올라가기가 좀 두려워졌다.


내려온 김에 동네 목욕탕이나 가서 추위에 지친 몸을 위로하기로 하였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하니 문이 닫혀 있다.


오늘이 신년 새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이불 동굴에서 뒹굴며 하루를 보내야 할 운명이었다.


방으로 들어오니 냉기가 몸으로 그대로 전해진다.


이불 동굴로 자연스럽게 몸이 향한다.


추워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이사 온 이후 한 번도 이불 빨래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불에서 나는 냄새가 그리 싫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새해도 되고 했으니 지난 1년 나와 함께 해준 이불 동굴과 작별하기로 마음먹었다.


청소도 하고 환기도 시키고 새로운 기분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후 방부터 청소를 시작하였다.


싸늘한 겨울의 한기가 그대로 느껴졌지만 그동안 묵혀 두었던 쓸데없는 소품들 과의 얽혀 있던 과거를 하나씩 정리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대학 시절 나를 좋아하던 여자 후배와 주고받던 편지들도 나오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군에서 찍은 사진들도 나오고…


별별 추억들이 다 나온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과거와의 추억 여행.


버리기 전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잠시 회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서둘러서 청소와 정리를 마무리하니 춥게 느껴졌던 방안의 냉기는 사라지고 추억에서 느껴질 따뜻함이 방안 전체를 덮은 듯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집안 전체에 광이 나는 느낌이 들정도로 깨끗해졌다.


따르릉 …


“여보세요?”


“막내냐? 엄마다.”


내 집으로 전화를 하면서 늘 “막내냐?”는 말을 잊지 않으신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들놈들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전화받을 때 한 번이라도 나긋나긋하게 응대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먼저 안부 전화를 한 적도 없었던 것 같고.


“일은 무슨… 정초에 떡국이라도 먹었나 해서 전화했지. 떡국은 좀 먹었나?”


“네. 주인집 할머니네와 함께 먹었습니다.”


“아이고.. 주인집이 그래도 고맙네. 우리 막내아들 정초에 밥도 챙겨주고.. 다음에 내가 서울 올라가면 인사라도 해야겠구나.”


“괜찮아요. 그렇게 안 해도 돼요. 제가 따로 인사를 하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알았다. 또 연락하마.”


아들놈과의 전화 통화는 늘 단답형으로 끝나는 나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그래서인지 딸 키우는 부모들을 그렇게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추억 여행을 시작하려는 즈음에 전화벨이 울렸다.


“뭐 하냐?”


이불 회사에 다니고 있는 최 장군 대학 선배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새해맞이 정리 정돈을 했지요. 집안이 아주 깨끗해졌어요. 하하하.”


“거짓말하지 마… 너 집은 정리한다고 해서 나아질 곳이 아니야.”


“하하하하하. 암튼 좀 깨끗해졌어요.”


“어디 안 나갈 거지? ”


“네. 집에 계속 있을 겁니다. 근데.. 뭔 일 있어요?”


“어.. 새해 음식 조금 싸가지고 갈 테니 나랑 같이 점심 먹자. 어디 나가지 말고 기다려.”


“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주니 고맙네요.”


“알았어. 나중에 봐.”


말은 좀 까칠하게 해도 마음은 따뜻한 선배였다.


자취하는 나에게 자주 음식도 가져다주고 해서 반찬은 거의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당구를 쳐서 반찬 값을 다 가져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늘 만나면 반가운 선배였다.


정리를 마친 후 어떻게 연락이 됐는지 보일러 수리공이 들어왔다.


새해 첫날은 다 쉬어서 일하는 곳이 없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집주인 할머니가 추운 방에서 지내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단골로 수리를 맡기던 곳에 급하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큰 고장은 아닌 것 같으니 잠시만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추운 곳에서 어떻게 밤을 보냈는지 궁금하네요. 젊으시니까 견딜 수 있었겠네요. 하하하.”


“추운 줄도 모르고 잔 것 같아요. 술 한잔 먹고 그대로 뻗은 것 같아요. 하하하.”


아마도 전날 종무식 이후 팀 회식하면서 마셨던 술 아니었으면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일을 다 알면서 사는 게 그래서 피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 고쳤습니다. 다음에 혹시 또 문제 생기면 이곳으로 연락을 주세요.”


스티커로 된 명함을 나에게 건넨다. 보일러 앞에 잘 보이도록 붙여 놓았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새해를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네요. 연락드릴 게요.”


다행이었다.


만약 수리가 안되었다면 밤을 보내기가 정말 무서웠을 것 같았다.


옥탑방의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옥탑방의 괴물 중 하나였다.


옥탑방 위에서 바라보니 장근 선배가 뭔가를 잔뜩 가지고 오고 있었다.


보기에도 힘들어 보여 마중을 내려가 짐을 받아 들었다.


“아니.. 이게 다 뭐예요?”


“어.. 음식하고 새해 선물이야.”


한 손에는 음식이 들어있는 상자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큰 이불 한 채가 들려 있었다.


두 개를 들고 올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너무나 고마웠다.


“이불은 뭐예요?”


“우리 회사 제품인데… 연말 행사 판매가 있어서 샀지. 네가 쓰던 이불과 이부자리에 냄새가 하도 심해서 말이야… 하하하.”


“별 냄새도 안 났었는데… 하하하.”


“안 나긴… 까만색이 광이 나는 건 처음 봤다. 더러운 시키야... 하하하.”


이불 빨래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냄새도 냄새지만 검은색으로 얼룩진 때가 광이 번쩍 날 정도였으니…


새로 가져온 이불을 펴 놓으니 정리 정돈의 완성이 되었다.


화사한 꽃무늬의 이불과 이부자리는 방 안의 계절을 봄으로 만들어 놓았다.


장근 선배가 가져온 음식을 냉장고에 대충 넣어 놓고 주변 당구장으로 가서 음식값과 이불 값을 다 갚아 주었다.


이 정도면 사기 당구였다.


암튼 당구 하나는 잘 치는 멋진 선배와 함께 짧은 신년의 모임을 마친 후 옥탑방으로 향한다.


과거와의 추억 여행을 시작하면서 젊은 날 옥탑방에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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