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와서도 기력이 없어서 한 일주일은 가게도 계속 쉬고 회복에 집중했다. 부종이 생기면 되돌릴 수 없으니 예방만이 최선으로써 스트레칭은 필수였다. 그러나 수술한 팔은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운동을 하려고 팔을 드는 순간, 심하게 당기고 붓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상태에서 팔을 다시 펴는 것은 더 어려웠다. 반은 엄살일 수도 있으나 아무런 감각이 없는 팔을 들어 올렸을 때의 그 느낌이란 마치 벌에 쏘여 땡땡해진 피부를 계속 찌르고 쑤시는 정도라고 설명하면 가늠이 될까. 아무튼 내 팔이 아닌 것 마냥 그렇게 일주일여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차츰 괜찮아질 터이니 그리 위안 삼으며 애써 무리하지 않았다.
수술 후 약 2주째 되는 날부터 카페 일도 다시 시작했다. 화분도 옮겨 테라스로 날라야 하고 중간중간 힘쓸 일이 계속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멈칫하긴 했다. 팔을 쓰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잔머리를 굴려 봤지만 그런 방법 따위는 없었다. 더는 엄살 부릴 형편이 아니었다. 나를 도울 사람은 오직 나뿐이므로.
암치료를 받는 동안만이라도 일을 하지 않고 백수로 지낼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았지만 그런 마음이야 말로 내게 사치였다. 돈은 감정이 없기 때문에 내가 암에 걸렸다고 해서 내게 동정을 베풀지도, 선처를 해주지도 않았다. 내가 암에 걸렸더라도 일은 내게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그렇게 나는 무소의 뿔처럼 또다시 혼자서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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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후 첫 항암은 보통 한 달 이내에 시행해야 한다. 만약 암세포가 수술이 가능한 사이즈라면 수술을 먼저 하게 되고, 그 반대이면 항암을 먼저 해서 암세포 크기를 줄인 후에 수술을 하게 되는데 그래도 다행히 나는 전자에 해당했다. 겨드랑이까지 전이가 되었긴 해도 수술을 먼저 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삼중음성 유방암은 암세포의 진행 속도가 상당히 빠르므로 자칫 조금 더 늦었다면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기까지 두 달 남짓 걸렸지만, 나는 더 늦지 않게 모든 치료를 제때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주변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목격하였으므로.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느꼈던 많은 것들이 결코 당연 치 않음을.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보였다. 이전에는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왔지만 어느새 마흔을 앞두고 건강을 잃은 채 죽음과 직면해 있다 보니 새삼 세상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치열하게 살았을까. 나는 어째서 그렇게도 악착같이 살아냈을까. 무한하지 않은 인생이건만, 나는 너무 돈만을 쫓으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투자한 시간과 노동력이라면 나는 이미 백만장자는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웃프게도 나는 여전히 가난했고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아내는 하루살이와도 같았다. 돈만을 쫓느라 놓친 많은 계절이 이제야 깨달아졌다. 주변의 이웃과 주위의 친구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금세 또 잊고 말겠지만, 삶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매일 생각했다. 다시금 음악을 듣게 됐고 예전에 내가 얼마나 감성적인 사람이었는지 깨달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가슴 뛰는 삶이 살고 싶어졌다. 내 옆에 놓인 현실은 여전히 차가웠고 냉혹했지만 그럼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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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가정을 가지고 크고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한 적이 참 많았다. 나는 저들보다 뭐가 부족해서 저런 삶을 살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 자신을 그들과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었다. 누구는 좋은 차를 타고 온몸에 명품을 휘감아 다니는데 나는 어째서 궁상맞게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건지 열등감에 빠져 우울했던 적도 많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한 번도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던 날이 없을 정도인 나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만큼 사는 게 힘든 날이 많았고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나는 대략 알았다. 의지할 사람도, 기댈 사람도 없이 오롯이 혼자서 세상을 살아내야 함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나는 일찍이부터 알았다.
유년 시절, 나의 로망은 내부에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나는 한 지붕 아래 여러 세대가 사는 집에 살았는데, 화장실이 하나였다. 화장실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매번 전쟁 아닌 전쟁이었다. 배에서 신호가 올 때마다 화장실에는 사람이 있었고 아침에는 더욱 심했다. 학교를 가기 전, 운 좋게 화장실을 가게 되더라도 옷에 냄새가 배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옷에 밴 냄새를 신경 쓰느라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어쭙잖은 핑계를 대고 싶지만, 나는 그저 공부에 재능이 없었다. 승부욕은 좀 있어서 어떤 한 친구보다는 성적이 잘 나오고 싶어 딱 그 정도로만 공부를 했을 뿐. 공부를 잘하면 뭐가 좋은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그런 이유 따위 모른 채 그냥 다녀야 하니까 학교를 다니는 식이었다. 집 화장실에는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내 다리를 타고 구더기가 올라오기도 했는데, 학교는 푸세식이 아닌 수세식이이라 나는 아마도 화장실 때문에 학교를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폭력적인 아빠로부터 엄마는 나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엄마는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집에 거의 없었다. 언제 들어닥칠 지 모르는 아빠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나는 집에서 늘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자칫 타이밍이 늦어 아빠한테 잡히게 되면 나는 밤새도록 두들겨 맞아야 했으므로 집은 내게 두렵고 무서운 공간이었다.
아빠의 폭행 대상은 처음에는 엄마였다. 시골에서 일거리가 없어 더 이상의 생계가 어려웠고 그래서 대전이라는 도시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렇게 유년 시절 엄마는 이사 온 동네 약국 앞에서 과일 등을 팔았는데 술에 취한 아빠는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일삼았다.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아등바등 번 돈을 아빠는 갈취해 갔고 뺏기지 않으려 버티던 엄마는 기어이 폭행까지 당하고 말았다. 그때의 엄마가 30대 중반 즈음이었다. 아직 철이 없는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나이였다. 그런 엄마는 나를 혼냈다. 왜 엄마가 맞고 있는데 가만히 있느냐며 아빠한테 대들고 말려야 하는 거라고 나를 힐난했다. 그날, 나는 용기를 내어 아빠한테 맞섰고 그때부터 아빠의 폭행 대상은 엄마가 아닌 내가 되었다.
한 번은 술이 잔뜩 취한 아빠한테 붙잡혀 방구석에 몰아진 적이 었었는데 나는 리모컨으로 맞고 파리채로 맞다가 장롱에 내동댕이 쳐졌다. 장롱에 꽂혀 내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아빠를 보며 이렇게 맞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때리다 지치면 세상모르고 자는 아빠를 보며 나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증오라는 감정을 먼저 깨우쳤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깨어나 나를 때릴지 모르니 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내가 아빠로부터 폭력에 노출될 때마다 내 옆에 엄마는 없었으므로 나는 간절히 이곳에서의 탈출을 원했다. 폭행의 흔적이 역력했을 것이다. 피멍이 들고 온몸이 성한 날이 거의 없었으므로.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모른 체했다. 엄마는 일만 하며 엄마의 인생을 참 열심히 살았으나 자식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그저 돈의 노예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폭력조차도 적응이 된다. 맞을 때 더 아픈 부위를 피할 줄 알게 되고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길 바라며 더 많이 아픈 척을 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을 나는 일찍이부터 깨달았다. 내가 통증에 둔감한 것이 어쩌면 어릴 때부터 다져진 내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나는 이 속담에 너무나도 동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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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고등학생일 때 아빠와 이혼을 했다. 아빠만 없으면 행복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아빠가 없더라도 내 인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가난은 나로부터 많은 기회들을 빼앗가 갔고 자유를 차단했으며 돈한테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1년 내내 같은 옷만 입는 애'로 나를 기억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갖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그것은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소유하는 방법보다 포기하는 법을 먼저 깨우쳤고 그렇기에 나는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게 되었다.
삶이 너무 지치고 힘이 들어 아무한테든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돈 때문에 포기하는 삶을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간절히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그때의 내 삶은 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그때 나는 그 지옥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아이 아빠를 선택했다. 잘못된 선택이었으므로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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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모포트(Chemoport).
항암제 주사를 지속적으로 맞다 보면 혈관이 약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럴 경우, 혈관이 터지거나 도망가서 갈수록 혈관을 찾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그래서 항암제를 투약하는 과정에서 혈관 밖으로 약이 새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피부 조직이 멍이 자주 들고 괴사 되는 등의 손상이 오게 되기도 한다.
나 또한 수술한 왼팔은 혈관주사를 맞을 수가 없고 오른쪽 팔에만 맞아야 하는데 혈관이 잡히지 않아 발에서 피검사를 하기도 했다. 팔이 접히는 부분이나 손등은 그나마 찰나의 통증이었다면 발등은 헉소리나게 욱신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당히 아팠다. 이렇듯 혈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에 안전하고 정확하게 약을 투입하기 위해 '케모포트'로 약물을 주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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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제를 맞기 전 케모포트를 먼저 심기 위해 수술 대기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환자가 어찌나 많은지 내 옆에는 꽤 많은 다른 환자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 다 한다고? 의구심이 들었으나 케모포트를 심는 시술은 30분이면 충분했다.
동전만한 크기의 원통형 기구를 피부밑에 이식해서 혈관으로 통하는 주사관을 연결하게 되는데 종양외과에서 국소마취로 시술하기 때문에 진행상황이 모두 들렸다. 주사로 여러 방 마취를 맞았기 대문에 통증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으나 관을 찔러 넣을 때는 뻐근함을 넘어 불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더라도 타는 냄새가 나고 듣기 싫은 기계 소리가 계속 들리면서 몸이 들썩거려지는 등 다른 감각을 통해 몸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몸이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몸에 없던 게 있으니, 더욱이 몸에 뭔가가 심어져 있으니 움직일 때마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옆으로 눕게 되면 신경이 온통 왼쪽 가슴 위쪽으로 향했다.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에 불편했고 뻐근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익숙해 지기에 며칠이면 충분했다. 주사줄이 꽂혀있지 않은 팔의 자유로움에 만족하며 금세 나와 한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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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독소루비신
C : 싸이클로포스파마이드
삼중음성이기에, 표적치료 없이 AC라는 항암을 하게 되었다. 케모포트를 심은 다음 날, 나는 예정대로 항암제를 맞았고 미리 각오는 했으나 예상보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독소루비신과 싸이클로포스파마이드 항암제를 차례로 맞는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고 몸에 퍼지는 느낌이 굉장히 강렬했다. 손발에 마비가 오고 뇌가 저린 느낌이었다. 몸에 열이 퍼지면서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듯했다.
통증에 익숙하고 잘 참는다고 생각했으나 세상에는 너무 많은 종류의 고통이 있었고, 세상 모든 고통을 다 경험해 보려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다시 또 낯선 고통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