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여정 Oct 15. 2023

Happy birthday to me

암환자의 외로운 생일날, 살아내고자 쓰는 일기






♥♡♥♡♥♡♥♡♥♡♥♡


 Happy Birthday to me


♥♡♥♡♥♡♥♡♥♡♥♡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39번째 생일을 항암을 하는 병원에서 맞이했다. 30대의 마지막 생일에는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기를 꿈꿨다. 좀 더 화려하고 거창하게 나의 30대를 보내고 40대를 맞이하고 싶었다. 막연한 로망이었으나 충분히 내 인생을 그러한 모습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었다. 그러나 어째서 생일이란 단어에 별 감흥이 없는 걸까.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항암의 끔찍한 고통 탓에 감정까지 무뎌져서일까.


삶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죽음 뒤에는 그대로 끝인 걸까. 살아있음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니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일이 더 이상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

.

.

지난주, 멋모르고 항암을 시작했다. 유방암이라고 하면서 수술날짜를 잡아주기에 수술을 했고 삼중음성 유방암이라면서 항암일정을 잡아주기에 항암을 했다. 항암에 대한 정확한 뜻도 방법도 모른 채... 남들 다 하기에 당연한 치료법인지 알고 따라 했다. 살고자 찾아간 병원에서 믿고 의지하려 만난 의사가 항암을 권하는데 거부할 환자가 몇이나 있을까. 그저 항암은 고통스러울 거라고만 막연하게 예상할 뿐, 어느 정도까지 고통스럽고 힘들지, 겪어보지 않았으니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암에 대한 통상적인 치료법이 항암일 거라고 그저 그 정도로만 이해한 후 시작한 항암이었던 만큼, 항암에 대한 무지가 나를 몇 배로 더 힘들게 했다.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항암에 대한 부정적인 영상들이 그토록 많았음에도, 어째서 나는 항암 이외의 다른 치료법에 대해서는 진지하게든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항암제를 겨우 1차 맞고 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큼 힘든 시간이라는 반증일 거다. 일분, 일초가 이토록 고통스럽고도 두려운데 남은 치료를 어찌 버텨낼 수 있을는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 뜰 기력조차 없어 감은 두 눈을 부르르 떨었다.




항암.

암세포를 죽이려 선택한 약이다. 그 독하고 강한 암세포를 죽이려면 정상세포까지 깡그리 죽여야만 한다. 우리 몸은 그간 살아오면서 크고 작게 아프거나 다치면서 같이 성장해 준 면역세포들 덕분에 생각보다 씩씩하고 강하다. 하지만 그 모든 몸의 흐름을 항암제는 단번에 무너뜨린다.


계속되는 속의 메슥거림, 구토, 어지럼증, 눈의 침침함, 손발 저림, 입안 터짐, 심장 통증 등등


삶의 질이 항암 전과 후가 끔찍이도 다르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이 계속 돌고 돈다.


돌고 돌던 세상은 이내 나를 집어삼켜 종내에는 저 깊은 지하 바닥에 나를 매몰시켜 버린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나를 가두고 계속해서 옥죄는데 나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

뇌의 욱신거림에 서 있을 수가 없다. 계속되는 메슥거림에 앉아있을 수도 없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먹을 수도 없다. 분명 살고자 하는 치료이나 점점 죽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말짱하지 못한 정신으로 버텨내야 함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한 지... 이렇게 무기력하게 얼마를 더 버텨내야 지금의 이런 고통이 끝날 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무너지고 약해졌다. 이 고통을 끝내고 싶으므로, 차라리 나를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까지 한없이 약해져 갔다. 마음이 약해져 가니까 몸이 더 아파져 갔다. 악순환이었다.




항암.

그냥 힘든 과정이라고들 말한다. 이미 무수히 많은 암환자가 겪어낸 암치료 방법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나 또한 잘 견디어 내고 건강 또한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들 말한다. 주변의 친구나 지인들은 그 정도의 위로 정도가 최선이다. 그들 또한 겪어보지 않은 일이고 겪지 않아도 될 일이기에 그 정도로 충분하긴 하다. 하지만 내게는 단 1%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몸이 아프다는 걸 변명으로 성격이 참 고약해져 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컨디션 기복이 심했다. 이제 좀 괜찮아진 듯하여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면 바로 다시 구토가 시작됐다. 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림을 넘어 소리를 지르고 애원을 하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전쟁을 끝내고 내 위를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치매끼가 있나 싶었다. 아까 밥을 먹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닐는지. 아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가 않았다. 정신줄이 흐릿해져 하루에도 몇 번씩,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했다.


   


너무 힘이 들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여러 번 나를 찾아왔다. 스스로를 강하다 여겼는데... 아직 젊으니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장담하기도 했는데, 반송장처럼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기력함에 마음마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에 한없는 우울감과 상실감으로 마음까지 병들어 갔다.



병원 침대에만 누워있는 게 하루 24시간의 거의 전부였지만, 병원에서의 하루는 결코 길지 않다. 아침 6시 30분이면 아침이 나오고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잠이 쏟아져 꾸벅꾸벅 졸고 나면 점심이 나온다.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면 다시 또 졸음이 쏟아지고 잠들지 않으려 간신히 버텨보지만 어느덧 다시 또 잠에 취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또 저녁이 나오고 나는 또 깊은 잠에 빠진다.  



약기운 때문일까. 잠을 자도 계속 잠이 쏟아졌다. 그나마 잠이라도 잘 잘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이었다. 계속되는 뇌의 멀미 증상과 그에 따른 속의 메슥거림으로 인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제대로 잠들지도 못한 채, 스스로 살아있는지 확인 정도만 한 채 거의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어떤 음식이든 제발 먹고 싶었다.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정말이지 격하게 먹고 싶었다. 그러나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가 나와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입덧 한 번 한 적이 없는 나였는데, 이런 고통이 입덧의 고통과 비슷하려나? 싶었다. 숙취가 싫어 술도 안 마시던 나였는데, 어렴풋이 술을 진탕 먹고 숙취에 몹시 괴로워했던 그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나는 살기 위해 뉴케어 영양음료라도 열심히 마셨다. 여전히 구내염이 심해 입안이 따갑고 아팠다. 입안이 벌려지지도 않아 빨대로 흡입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빨대를 빨아들일 때마다 입안이 이에 닿으면서 통증이 심해져 호흡을 가다듬고 전략적으로 마셔야만 했다. 힘을 최대한 빼고 숨을 참은 채 내 입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들이켜야 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먹지 않으면 암세포를 다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영양실조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물론 영양제를 계속 맞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목숨을 연명하려 숨을 참고 억지로 꾸역꾸역 마셨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졸다가, 깼다가, 울다가, 웃다가를 몇 번 반복하니 하루가 금세 가버렸다. 살아온 인생 통틀어 가장 허무한 생일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이었다. 39번째 생일은 그렇게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작가의 이전글 케모포트 그리고 AC항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