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이라는 말은 쑥섬에서 불리는 말이지만 이것은 실은 '몽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부르자면 '팽널이/평널이 몽돌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널이'는 다른 이름으로 '팽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평'은 '평평하다'로 '팽'은 '팽나무'를 지칭한다고 합니다. '널이'는 계곡이나 바닷가의 '너른 반석'을 이름합니다.
'평평한 바위'여서 '평널이'이기도 하고 '옛날에 팽나무가 있었다'하여 '팽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실은 '자갈밭'이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어디 거제도 몽돌해변이니 근처의 나로도 염포마을의 몽돌밭처럼 그렇게 큰 '자갈밭'은 아닙니다.
다만 쑥섬에서 몽돌을 만날 수 있는 '자갈밭'이 그곳이 그나마 규모가 큰 곳이고 자갈들이 윤기가 자글자글 하여서 쑥섬 사람들이 종종 그곳에 가서 사진도 찍고 놀다 오기도 하는 곳입니다.
물론 거기에 주로 낚시나 미역철에 미역을 하러 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숭어 도팍/바위'이 있어서 숭어를 낚으러 종종 가는 분들이 계시긴 합니다.
파도가 높거나 너울이 이는 날에 그곳에 가면 그 청자갈밭에 가면 자갈 구르는 소리와 절벽 끝에 흐르는 흰 구름을 올려다보노라면 절벽을 타고 오르는 파도와 자갈 구르는 소리에 압도당합니다.
또한 그곳에는 자연동굴이 하나 있는데 잘 알려진 '중빠진 굴'과 같은 천연 동굴인데 깊이는 '중빠진 굴'의 절반 크기이고 들어가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으나 그 동굴이 '평널이 자갈밭'에서 올라오는 파도소리와 자갈 구르는 소리의 울림통이 되어서 봄에 너울이 일어서 파도가 높을 때는 가히 혼을 빼놓을 만큼 대단한 소리를 냅니다.
위치는 '쑥섬 당숲'을 지나 '환희의 언덕'을 거쳐서 '하늘공원'으로 마악 올라가는 좁은 길 왼쪽에 가파른 벼랑이 보이면서 대나무 숲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 벼랑이 직벽으로 천길 낭떠러지이면서 '자갈밭/몽돌밭'이 있는 곳입니다.
내가 가진 크기와 모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세상에 나서 가지고 있던 나의 모는 아직 얼마나 남아 있으며 앞으로 얼마를 더 연마를 하고 다듬어야 곱디고운 크기의 알맞은 윤을 내는 모양이 될까도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시간까지 오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기까지는 내가 잘 나고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가진 모를 견뎌주고 이해해 준 수많은 사람들의 넓은 도량과 아량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처음에는 서툴러서 많은 실수들을 했을 것이고 좀 나아지는 시기에는 너무 패기만만함이 부른 실수들이 좀 많았겠습니까?
그 시간들로 해서 함께 한 이들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했던 일들이 어디 한두가지였을지요.
내가 가진 여러 모양들은 분명 그들은 견디면서 함께 호흡하고 함께 갈 수 있는 어느 시간대를 기다려 주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건설용어 중에 '다짐'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땅을 다진다'라고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말 그대로 기초를 잘 다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구조물이 든든하게 오래갈 수 있습니다. 다짐이 좋지 않으면 그 위에 세우게 되는 구조물이 틀어지거나 균열이 생기게 되니 이 기초는 만사의 기본이랄 수 있습니다.
다짐이 잘 되기 위해서는 특정 크기의 자갈이나 모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크기의 모래와 골재가 잘 섞여야 각각의 모를 가진 다른 형상의 모래와 골재가 만나 이루는 공간을 채워서 다짐률을 높게 낼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모를 가진 모든 것들이 만나면 서로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는 물을 저장하게 되면서 그 물은 결국 지반을 무르게 하면서 기초를 무너지게 합니다. 그러니 그 공간에는 또 다른 크기의 모를 가진 입자가 차 들어가 주어야 '공극'이라고 하는 공간이 채워져 다짐이 좋아지고 위에 놓이게 되는 구조물의 하중을 견뎌주거나 지반을 단단하게 버티어 줄 수 있다는 겁니다.
나의 크기를 알고 내가 들어가서 감당해 주어야 하는 역할을 하기까지 나와 함께 일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들과 견딤이 있어야 했을지요.
팽널이 자갈 구르는 소리
팽널이 청자갈밭에 가 보면 거기에 직하절벽이 주저앉아 만들어진 커다란 바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어느 시간대에 벼랑이 주저앉아 거기 아직 커다란 크기로 남아 있는 바위들 아래에는 닳고 닳아 윤기 나는 '몽돌'에서 다시 '자갈'로 가고 있는 시간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모를 가진 돌들이 얼마나를 거기에서 파도에 모를 깎고 깎아서 몽돌이 되고 다시 자갈이 되고 그 자갈들이 닳아 윤기를 저토록 내는가를 두고두고 생각을 해 왔습니다.
내가 가진 모는 언제쯤이면 다 닳아서 윤기가 날 수 있을 것인지.
우리네의 삶은 얼마나 한 시간이어야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모를 다 자르고 윤기 나는 여생을 살게 될까를 내도록 생각하고 생각을 합니다.
어느 때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절벽이었다가 어느 시간대에는 폭삭 주저앉아 무너진 돌더미 속에 묻혀 있다가 파도와 너울을 만나 내가 가진 욕심의 날들을 다 제거하고 더 부딪히고 시간을 견뎌야 누군가가 간직하고 싶어 하는 반짝이는 윤이 나는 몽돌이 되고 조약돌이 될 수가 있을지요.
그러다가 다시 퇴적의 시간대에 가 머물며 다시 영생을 얻게 될는지요.
오늘도 벼랑을 타고 오르고 있을 쑥섬의 뒷먼 팽널이 청자갈밭에 엄청나게 크게 소리를 내면서 구르고 있을 청자갈들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사나운 모를 다듬어 보고자 합니다.
<팽널이 자갈 구르는 소리>
몇 날
몇 일
속 뒤집어지는 일만 겪다가
문득 팽널이 자갈들 안부가 궁금하여
우여곡절의 뒷먼을 넘어갔었지
너는 좀 어쩐가 싶어
그 윤기 반들거리는 매끈함을 기대하여
너는 여전히 살만 한가 싶어
벼랑길을 타고 넘어 팽널이 자갈밭을 갔었지
세사
한시도 조용한 적
있었던가
너무 기대하지 마라
너무 나무라지 마라
세상
그 쉼 없는 소리들이 벼랑을 타고 오르는
그 하염없는 시간들이 소리로 돋아 오르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몸으로 구르고 있구나
소리를 지르고 있구나
세상은 늘 아우성입니다.
서로가 다른 크기의 기준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한 시도 조용하지를 않습니다.
다들 생각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고 서로가 갖고 있는 제각각의 모가 있어서일 겁니다.
이 사회가 단단해지고 든든해지기 위해서는 서로의 크기와 모를 인정하고 그 크기대로 그 모양대로 차곡차곡 채우고 빈 공간들을 찾아서 제 몫을 다해 주어야 하는데 여전히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는 소리와 아우성으로 세상은 늘 시끄럽습니다.
어쩌면 이런 소리와 아우성은 앞으로도 끊이질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람하고 사람이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들은 자기들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고 있는 소리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사람 사는 소리이고 모양이라구요.
언제 다시 쑥섬으로 들어가면 소리 대신에 휴식과 휴면으로 빛이 나고 있을 청자갈들의 윤기를 보고 싶습니다.
그 아우성의 뒤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 윤기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크기와 윤기와 빛들을 내 마음에 담아 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