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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이야기(21)

남풍이 불면

by 명재신


쑥섬에서는 남풍이 불기 시작하면 오동나무 배나 여러 소재로 배를 만들어 안몰짝 선착장에서 건몰짝 선착장 쪽으로 배를 띄워 놀았습니다.


언제 쑥섬에 들 때면 오징어 등뼈를 구해서 '오징어 돛배'를 만들어서 띄워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사십대 중반인 막내누님 조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길레 저를 대신해서 띄우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뜻밖의 놀이에 신이 나서 저를 대신해서 즐겁게 오징어 돛배를 띄우고 놀았습니다

다만 남풍이 아직 불지를 않았고 살짝 북풍이었기에 '안몰짝 선창'에서 '건몰짝 선창'으로 띄워 보내지는 못했지만 오징어 등뼈를 구해오고 만드는 모습을 보고 형제들은 재미있는 풍경이라며 즐겨 하였고 저 또한 아직까지 저에게 이런 동심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동심이었는지 치기였는지는 아직도 웃음을 웃게 하지만 그래도 이역만리 중동 땅에서 허구한 날 그런 유년 시절의 놀이들을 추억하고 언젠가 고향 쑥섬에 들면 이를 꼭 한번 해보고자 했던 오랜 소망을 하나는 이룬 셈이었습니다.


오랫만에 만들어서인지 아니면 서툰 솜씨여서인지 오징어 돛배는 도착지인 안몰짝 선창까지 항해를 하지 못하고 도중에 전복(?)이 되어 버리자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건져 달라고 해서 이번에는 물에 젖어도 다시 띄울 수 있도록 돛을 하얀 비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직도 그 오징어 돛배는 쑥섬 주변을 항해하고 있을 겁니다.


남풍이 분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산 넘어서 남풍이 불어온다. 이파리보다 꽃을 먼저 내어놓는 것도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의 영향일 것이고, 삭막한 거리에 말뚝처럼 겨울을 박혀있던 가로수가 잎을 틔워 낼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이 남풍이 부는 까닭일 게다.


봄은 늘상 이 바람을 따라 들어왔다. 종종 꽃이 피는 것을 샘하는 시베리아 기단의 꽃샘 추위도 있지만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이 기운을 어쩌지는 못한다.


남풍에 어울리는 꽃은 역시나 개나리일 게다. 겨울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꽃, 사실 오래 전 삼동부터 동백은 피어 주변에 있었지만 움츠린 가슴으로는 그 꽃을 화사한 색깔로 받아 들이지 못했고 노란 빛깔의 개나리를 보고서야 꽃으로 깊숙이 받아 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남풍이 분다.


꽃을 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계절로부터 꽃을 보는 반가움으로 매일을 채워도 될 계절로 데리고 갈 봄바람이 분다.


남풍이 부는 이맘 때면 문득문득 죽어서도 살아있는 눈들이 생각이 난다. 정확히 언제였는가 하는 기억도 없는 고향 쑥섬에서의 기억들.


당시 고향 쑥섬마을은 고흥 가는 길에 쑥섬 부자들 땅을 밟지 않고서는 못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부촌이었다가 점차 쇠락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많은 지폐를 저장해 둘 곳이 없어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가 그만 거기에 곰팡이가 피어 돌깨 큰어머니가 한나절을 말리느라 지켜 앉아 있었다던 돌깨 형님네 돌담들도 그 탱탱하던 직선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섬마을 둘레에 박혀 있던 돌말뚝에 걸려 있던 배의 모릿줄이 하나 둘씩 비어만 가고 있었지만 잘 살던 집안들이 왜 하나 둘씩 여수로 부산으로 빠져나가고 있는지 어린 나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남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열에 들뜬 사람 마냥 오동나무만을 찾아 헤매었던 기억, 그 기억의 시작은 바로 배 띄우기 놀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을은 궁핍해져 가는 상황에서도 남풍이 불어오면 매년 거르지 않고 그 행사를 꼭 치루어냈었다. 잘 다듬은 오동나무배에 돛을 달아 북쪽으로 띄워 보내는 건 고학년 형들의 몫이었고, 그 흉내를 내어 조악한 오동나무 배를 띄우는 건 우리들 조무래기의 몫이었던 그 배 띄우기 놀이.


안몰짝 선창에서 건몰짝으로 때마침 부는 남풍을 태워서 보내는 배 띄우기 놀이였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부력이 좋아서 플래스틱이나 스치로폴로 만든 부표가 나오기 전에 주로 그물에 부표나 그물을 띄우는 부위에 많이 썼기에 당시에는 배를 부리는 집에서는 쉽게 구할 수가 있는 목재료였는데 집집마다 아이들은 정월 대보름에 뇌성화 놀이(쥐불놀이)를 치루고 난 뒤부터 그 오동나무를 구해서 배를 깎기 시작했고 곧 불어올 남풍을 기다리며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조무래기들은 작은 조막손으로 오동나무를 깎다가 다친 손가락 몇 마디에 헝겊을 동여 매고서도 기분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키를 달고 배 이름을 적고 돛에다가 소망을 적고서는 정성껏 달아 붙이던 놀이였던 것이다.


그날은 부락의 앞바다에 마치 연등놀이 때의 연등들처럼 크고 작은 배들로 쑥섬 앞바다가 가득 차 있었다.


둥둥실 떠다니던 그 중 일부는 작은 돛 가득 남풍을 안고 북쪽 어디론가 떠나갔고, 대부분의 배들은 남풍을 받아서 안몰짝 선창에서 건몰짝 선창 안쪽으로 잘 도착을 하면 그것들을 다시 건져 들고 안몰짝으로 달음질을 쳐 가서 다시 띄우고 몇 날 몇일을 그렇게 하면서 뱃놀이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다가 파도라도 센 날이면 파도에 뒤집히거나 키를 잘못 달거나 돛이 물어 젖어서 뺑뺑이를 돌다가 뒤집혀 파도에 밀려 건몰짝으로 밀려들곤 했다.


어느 해였던가. 오동나무를 구하지 못한 나는 막내 누나를 삼동 내내 보챘다. 설날을 보내고 정월 대보름을 지나도록 오동나무를 구하지 못한 나는 눈에 독기를 품고 누나를 쫓아다니며 오동나무를 누나 동창들을 통해서 구해 달라고 징징 거렸던 것인데, 초등학교 상급생이었던 누나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지 그렇게 매일을 성가시게 구는 나를 데리고 하루는 부락의 뒤편으로 갔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부락 뒤편 바위틈에 곧잘 밀려와 끼어 있던 오동나무 부표라도 찾아 주려나 싶어 졸랑졸랑 따라갔던 것인데 누나는 도중에 나를 세워 놓고 바다에 밀려다니고 있던 절반은 상한 갑오징어를 가리키며 건지라는 거였다.


여섯 살 터울이였던 누나의 의중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시키는 대로 그놈을 건져 올렸다. 남풍이 불어올 기미가 보이면서 쑥섬마을 주변으로 갑오징어가 많이 밀려들었고 그 중에 일부는 어쩐 영문인지 모를 이유로 수면에 떠다니는 것들이 있었는데 건져 올린 것은 바로 그런 놈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오랜 시간 밀려다니다 먹지도 못할 만큼 상한 갑오징어를 건지라는 건지, 그놈이 남풍에 띄울 오동나무 돛배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건져 올렸더니 누나는 심하게 풍기는 상한 냄새에도 아랑곳 않고 갑오징어의 등뼈를 발라내 바닷물에 깨끗이 씻고는 나를 돌아보며 그랬다.


"갑오징어는 멀고 거친 바다에서 봄을 따라 올라와 우리 쑥섬마을을 지나간데"


"그래서?"


"수많은 떼가 구름처럼 말이야."


"누나"


"봄바람을 타고 북쪽 어디론가 올라가려고 저 심한 너울을 타고 따라 들어 온데."


"누나!"


"그러다가 어떤 오징어는 공기주머니에 바람이 들어 물위로 떠오른다는 거야."


"에이 씨, 그게 어떻다는 거야!"


기어코 나는 누나를 쥐어뜯고야 말았다.


"너가 배 띄운다고 오동나무 구해달라 그랬잖아? 대신 저 갑오징어 등뼈로 배를 만들면 되잖아!"


누나는 하얀 갑오징어 뼈와 나를 목넘에 남겨 두고 돌아가 버렸고 나는 그 갑오징어 뼈를 작은 발로 밟아서 지근거리고 말았다.


남풍이 불면 나는 왜 그날 그 갑오징어를 누나의 말대로 곱게 다듬어 남풍에 띄워 보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누나를 쥐어뜯으며 그놈을 바위 위에 놓고 두 발로 지근지근 밟아 조삭거려 버렸는지, 키를 달고 돛을 달아 오르고 싶은 곳까지 더 올라가라고 놈들을 바람에 태워 보내주지 못하고 우악스럽게 깔아뭉개어 버렸는지를, 웃음을 베어물며 이 봄바람이 지나왔을 남쪽 하늘을 건네다 보곤 한다.


내 커다란 욕심의 돛을 매달만큼 갑오징어 등뼈는 등판이 넓지를 못하였고, 남은 다 좋은 오동나무 돛배를 띄워 멀리 보내는데 좁은 돛으로 얼마 못 가고 뒤집힐 갑오징어 돛배가 부끄러웠던 것이었을까?


남풍이 불면,

오늘같이 이렇게 남풍이 불면 안간힘을 써도 더 이상 북상을 못하고 이쪽의 땅에서만 살아서도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갑오징어 떼가 생각되어진다.


남풍에 돛을 올려서 오를 수 있는, 사계절 중에서 유일하게 희망이 시작되는 이 봄날에.



<배 띄우기 놀이>


남풍이 인다


오동나무를 찾어라

먼 바다 배들 떠날 시간이다

안몰로 오너라


돛을 달아라

닻을 올려라


동바다로 갈거나

울진 앞바다 왕돌짬

서바다로 갈거나

영광 앞바다 칠성바다


바람이 좋다

어여 가자


오징어 배도 좋다

종이배를 접어서라도 띄워라


마파람이 분다.


출처 : 명재신 제4 시집 '쑥섬 이야기' 중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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