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쇳물(1984년 9월)지에 실린 '쑥섬이야기'
포스코 쇳물(1984년 9월)지에 실린 ‘쑥섬이야기‘
'소년과 예배당 종소리'
섬 꼭대기에서 찢겨진 저 구름발들은 또 무슨 일을 저지르러 저렇듯 전사들처럼 수락도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일까?
섬을 삼켜 버릴 듯이 몰아치는 폭우를 동반한 이 태풍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불안했다.
몰려든 파도가 너무나 쉽게 돌담을 무너뜨려 버리고 마당까지 몰려들고서부터 나는 녀석에게 내뱉었던 그 말이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느넨 벌받을 거야!'
칠흑처럼 어두운 저편 축정의 도단집 예배당을 허사인 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눈을 부릅뜨고 건네다 보았다.
어제 새벽에도 오늘 새벽에도 그 종소리는 돌려오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아떨어져 버린 것인가?
고무신짝만 한 조그마한 섬.
그 게딱지 모양 일궈진 밭에 대차게 뻗던 녹두순이 까맣게 타들어갈 정도로 음력 8월 초순 그 여름은 가물었다.
그 때문인지 고기도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름값도 나오지 않은 출어는 잃을 줄 알면서 치는 삼봉이라고 했다. 그렇듯 멸치 한 마리 구경하기 힘든 가뭄으로 인한 흉어가 계속되자 아버지와 쑥섬 사람들은 그날 새벽에 있었던 소리의 침범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정월 초사흗날, 그러니까 당제(堂祭)를 지내던 날 새벽, 어떠한 잡음도 결코 용납이 안 되는 그날 새벽에 제주가 건너편 도단집 예배당 종소리를 들었다고 한 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부터 섬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부정을 탔어!'
섬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 오랜 기억 속의 사건은 그 때문에 가뭄이 들고 흉어가 계속된다는 피해의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깊게 심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축정 도단집을 건네다 보는 아버지의 그 원망의 눈초리는 너무나 빨리 흉흉하게 변해갔다. 그러다 어느 해 큰물지고 가파른 벼랑이 주저앉으면서 생긴 공터를 조개껍질 모양 차지하고 있는 도단집 예배당 노인을 만나기 위해 두 주먹을 움켜쥐고 나로도 본섬으로 건너갔다.
'부정을 타서 가뭄이 든 게야'
아버지의 그 원초적인 믿음은 종을 부숴버려서라도 매일 새벽에 들려오는 소리의 침범을 기어코 멈추게 하고야 말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저녁에 맥없이 두 어깨를 늘어뜨리고 건너오던 아버지를 보았다. 힘으로는 태영이 녀석과 칠순이 넘은 그의 할아버지를 꺾지 못할 아버지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안돼..., 막아야 해...'
초췌한 뭇 조무래기들하고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잘 익은 살구처럼 복스런 녀석의 얼굴과 어른스러운 행동에 대한 반감이 아니었더래도 섬이 가라앉을 듯한 무거운 분위기는 나만이라도 소리의 침범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벼랑이 또 주저앉아야 그놈의 종소리가 안 날 것이야.'
흉어와 가뭄은 결코 남을 미워한 일이 없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 모두를 변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어느 해 큰 바람과 큰 비가 내린 뒤에 무너져 내렸다는 도단집 예배당 터의 이야기가 또 이루어져야 예배당 종소리가 그칠 것이라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태영이를 만난 것은 5학년 2반 교실 앞에서였다.
"종은 누가 쳐?"
다짜고짜 녀석의 앞을 가로막고 내가 그랬다.
"......."
" 종을 누가 치냐고 이 자식아!"
"할아버지"
" 너는?"
" 가끔씩"
" 몇 시에"
" 새벽 4시"
"너, 비가 왜 오지 않는지 알아?"
"!"
솜털 보송보송한 태영이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 앞으로 종을 치지 마"
나는 강한 시선으로 녀석을 노려보며 그렇게 징을 박았다.
"....."
"알겠어?"
다시 다그쳤다.
"안돼!"
"이 새끼가!"
내가 녀석에게 돌진한 것과 녀석의 코에서 코피가 퍽하고 터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녀석은 너무나 약골이었다.
"이 자식아, 그 소리 때문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변했는 줄 알기나 해?"
"......"
"앞으로 절대 종을 치지 마, 알겠어?"
"그런 억지가 어딨어!"
녀석이 흐르는 피도 닦지 않고 바싹 다가서며 그렇게 말했다.
"뭐, 이 새끼야?"
나는 두 주먹을 바싹 감아쥐고 다시 녀석을 노렸다. 그러나 나는 녀석의 그 그늘진 눈에서 나오는 어떤 기운에 밀려 그만 멈춰 서고 말았다.
녀석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무엇 때문에 너가 나를 미워하는 줄 알아. 우리 종소리 때문이라고 니네 아버지가 소란을 피우는 것도 봤어. 하지만 니네 쑥섬 사람들이 바라는 것도 비가 오고 고기가 잘 잡히는 것이겠지. 할아버지가 매일 새벽에 종을 울리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했어"
"거짓말!"
나는 녀석의 말을 막아섰다. 그리고 강한 눈길로 녀석과 맞부딪혔다. 어느 한쪽이 주저앉지 않고서는 비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자식, 느넨 벌 받을 거야. 두고 봐"
밤이 되면서 태풍은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느넨 벌 받을 거야!"
무엇이 그토록 모두를 악하게 만들어 버렸던가. 철저하게 두 섬을 양분시켜 버렸고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가뭄이었던가. 그 종소리 때문이었던가.
"반가운 손님이야.. 손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모든 사물과 생령들을 이 세상에서 모두 앗아갈 것처럼 몰아치는 태풍을 두고 그런 알 수 없는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우뭇가사리 바래듯 그 핏발 섰던 눈빛을 태풍이 삭혀 버렸던 것일까. 태풍이 극을 향해 치달아가는 자정 무렵이 되어갈수록 아버지는 오히려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아, 아버지가 평온을 되찾았어.."
그때에사 나는 마음 깊은 곳에 간절한 소망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래, 아버지가 소란을 피운 것도, 너에게 못된 짓을 한 나도 너희 할아버지가 종을 치는 것하고 같은 것이었어' 하고 녀석에게 사과하는 것이었다.
"바다 속까지 확 뒤집어졌을 테니 고기가 좀 잡힐 거야"
녀석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종소리, 종소리가 듣고 싶었다. 간절하게.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원제 '소년과 예배당 종소리' 내용을 일부 수정해서 올림.
1984. 9. 포스코 '쇳물' NO.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