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숲 문 닫는 날
안녕하십니까?
새해 복 받이 받으십시요.
올 한해에도 늘 건강하고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금단의 숲 문 닫는 날‘
어제가 정월 초사흘이었습니다.
예전의 풍습이었다면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쑥섬에서는 두 가지 큰 행사가 있었을 겁니다.
금단의 숲 당숲에서 있었을 당제와 당굿입니다.
금줄을 걷고 금단의 숲으로 들어가 당제를 모시는 것과 당제를 모시고 나와 다시 금줄을 치고 금단의 숲 쑥섬 당숲 문을 닫는 당굿의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언제부터 쑥섬 사람들이 당숲을 조성하고 그곳을 금단의 숲으로 만들었는지 기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전래되어 오는 이야기도 없는 듯 합니다. 다만 숲에 있는 다양한 고목들의 수령으로부터에 그것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400년 이상 된 것은 분명한 거 같습니다.
쑥섬에는 기록 상으로 1611년 광해군 3년에 김해 김씨가 처음 입도한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그리고 밀양 박씨가, 연안 명씨가 순차적으로 들어와 정착을 하는 걸로 나옵니다.
그러닌까 지금으로부터 414년 전부터 쑥섬에 사람이 들어와 씨족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인데 그 이전부터 당숲은 자연 숲으로 존재를 했을테고 그 이후에 입도민들이 늘어 나자 당집이 지어지고 당산을 신성시하면서 당숲의 출입을 엄하게 금하였을 것입니다.
1912년도에 쑥섬에는 어선이 70여척이었다고 기록상으로 나옵니다.
지금의 나로도항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바람이 불거나 폭풍으로부터 피항을 할 수 있는 쑥섬 앞바다가 자연적으로 조성된 포구의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으며 그만한 어선들이 와서 머물기 위해서는 어선에 승선한 어부들과 어구 그리고 식수와 식량을 보급할 수 있는 자연부락이 형성이 되면서 다양한 성향의 씨족들이 정착하게 되면서 가구수도 100여 가구가 넘어서고 부락이 번성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의 기록으로 보면 한 척의 배에 통상 4명이 승선했다고 보면 적어도 280여명의 어부들이 드나들었을 것이고 주민들까지 포함하면 더 많은 어부들과 주민들이 북적거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필연적으로 어선들이 근해바다나 먼바다로 항해하거나 물고기를 잡는 동안의 무사 항해와 무사 조업을 기원하기 위해 당신을 모시고 당산을 조성했을 것입니다.
그 신이 사는 영역에는 출입을 엄하게 금지하였고 그 오랜 세월동안 그 당숲은 금단의 숲으로 그 누구도 함부로 출입을 하거나 당숲을 이루는 나무에 대해서도 손을 대지 못하게 엄하게 규율을 만들어 관리를 해 왔던 것입니다.
매년마다 쑥섬에서는 당제를 모시어 당할아버지 당할머니에게 한해의 마을과 주민들의 매사에 무사 무탈하게 해 주시고 마을의 안녕과 조업을 나서는 배들의 풍어를 기원했습니다.
정월 초 나흘날에는 제주들이 당집 앞에서 제사를 모시고 내려온 아침을 기하여 당숲 입구에 금줄을 치고 이후의 출입을 엄하게 금하는 표식을 하면 그 당숲 입구에 다시 상을 차려서 술을 올리고 마을 사람들이 올라가서 상당굿을 쳐서 당숲 문이 닫혔음을 모든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면서 모쪼록 당숲 안에 신령스러운 당할아버지와 당할머니께서는 문을 나서는 일이 없으시기를 기원하였습니다.
당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날에는 무언가 계고로 여겨지고 그 이후에 늘 쑥섬에는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숲을 뒤로하고 내려와 ‘안몰짝 본부당/아랫마을 보리마당(지금의 ‘쑥섬‘호 선착장)’에 내려와 상을 차리고 술을 올려서 ‘하당굿‘을 쳤습니다.
그 곳에는 수많은 목숨들이 드나드는 또다른 문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용왕님의 영역이었기에 용왕님에게 잔과 음식을 잘 차려서 난 바다로 드나드는 쑥섬 사람들과 쑥섬을 드나드는 모든 배들의 한 해 무사 항해와 조업을 기원하면서 올 한 해 풍어를 기원하였습니다.
그 바다로 드나드는 문에서 풍물을 일어서 사람들에게는 바다로 나서는 문이 열렸음을 또 알렸던 겁니다.
겨울 내내 추운 날씨와 궂은 해상의 일기로 묶여 있던 어선들을 손보고 출어를 위한 준비를 하라는 일종의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바다로 나서는 문을 여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용왕님께 고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당숲 입구에 금줄을 치고 상당굿을 쳐서 문이 굳게 닫혔음을 당숲 안팎으로 알리고, 바다의 문은 하당굿을 쳐서 용왕님께 문을 열어 주십사 고하면서 뱃사람들에게는 이제 문이 열렸으니 출어을 위한 채비를 하자고 하당굿을 거하게 쳤습니다.
이 상당굿 하당굿을 시작으로 보름까지 샘마다 돌면서 샘굿을 그리고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밟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로 금단의 숲 쑥섬 당숲의 문을 닫는 날이고, 생계의 터전인 바다의 문을 여는 날인 겁니다.
‘당굿*’
음력 정월 초사흘
울음 우는 모든 짐승은
쑥섬 밖으로 내 보내야 쓴다
석 달 열흘은
당할아버지를 모시고
당숲을 지켜야 한다.
당제를 지내는 날은
아무런 소리도 부정을 탄다
금줄을 쳐라
금기를 지켜라
당제를 끝내면 굿을 일어라
풍악을 일어라
상당굿 하당굿
내도록
진심으로 기원하라
올 한 해는
당할아버지 노여움이 없어야
풍년 풍어만이 있을 것이다.
*당굿 : 당제를 지내고 당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상당굿을 하고
내려와 안몰짝 보리마당에서 하당굿을 했었다.
-제4시집 ‘쑥섬이야기’ 63페이지'당굿' 시 인용
쑥섬에서 가장 엄하게 출입을 금하였던 곳은 바로 당숲이었습니다.
가장 신성시하였고 매년 정월 초사흘에 당제를 모시는 제주를 제외하고는 드나들 수 없도록 늘 금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숲에서는 어떠한 나무도 삭정이가 되어서 썩는 한이 있어도 묵은 나무나 넘어져서 땔감목으로 좋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어도 주워다가 땔감목으로 쓰는 것조차 금하였습니다.
모르게 주워다가 쓰다가 들통이 나면 마을에 규율에 따라서 그 정도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거나 마을 공동으로 일을 하는 ‘부역‘에 몇 번을 나가서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심한 경우에는 ’덕석말이’까지도 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노인들은 자기네 손자들이 그 안으로 드나드는 것을 금기시했던 또 다른 이유는 철없는 아이들이 그곳을 드나들면 부정을 타서 마을에 안 좋은 일들이 생기면 그 탓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집안에 안 좋은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자식들이 먼바다에 나가 있었거나 객지에 돈 벌러 나가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지악스럽게 이를 이르고 타일러서 당숲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도록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장궂은/드세거나 짓궂은’ 아이들은 그 안에 많이 열리는 ’자밤나무/구실잣밤나무’에 열리는 ’자밤/잣밤‘을 따 먹으로 몰래몰래 드나들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 전쟁놀이를 온종일 하다가 내려와 들켜서 크게 혼이 나거나 ‘뒤지게 두드려 맞기도’ 했었습니다.
그중에 저도 종종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덕석말이'
펼쳐라 펼쳐라 덕석을 펼쳐라
니 죄를 니가 알렸다
지엄한 규율을 무시한 니 놈의 잘못이 무엇이더냐
덤불샘 동각샘에서 아녀자를 희롱하였소
엄히 금하는 당숲 나무 몰래 주어다 딸감으로 좀 썼었소
막어놓은 갯바탕에 들어가 무단으로 갯것을 좀 했었소
지난 밤에 남의 어장에 들어가 고기 서리 좀 했었소
말아라 말아라 덕석을 말아라
우리 부락 규율이 지엄하다는 걸
모든 부락민이 들어 일벌백계로 다스리리라
살려주소 살려주소 아이고야 데이고야
세상 사 고달프고 힘들어 덕석에 말리더래도
쑥섬에서나 살고지고.
*덕석말이 : 쑥섬은 규율이 엄하여 이를 어기면 보리마당에서 덕석말이로
체벌을 했다.
- 제4시집 ‘쑥섬이야기’ 86페이지 '덕석말이' 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