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과 조카(3)-금단의 숲
서울에는 눈이 내렸습니다.
한강이 얼고 세상이 꽁꽁 얼어 붙었습니다.
늘 건강 잘 챙기십시요ㅡ
삼촌과 조카(3)
- 금단의 숲
정월 보름달이 떠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어둠은 숲 속에서만 머물고 있을 뿐 구릉으로는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부락은 매우 조용하게 잠들어 있었다.
집짐승들을 섬 밖으로 내몰아 내던 그만이 일행 중에서 보이지 않았다. 일행의 발걸음은 마치 잠적해 들어가는 도둑처럼 조용했다. 제주(祭主) 뒤를 따르는 이장댁은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이장댁 뒤로 김 감독이 따르고 있었고 그 뒤로 김 촬영감독이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종종 좌우로 행렬을 이탈하였다가 하면서 뒤를 밟았다.
맨 뒤에 내가 있었다. 그 앞에 반 작가가 두런거리며 노트에다 뭔가를 적어 넣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당제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엄한 계율을 깨고 있는 셈이었다.
당숲으로 이르는 길섶에 김 촬영감독이 제주만을 포커스에 넣어 촬영하느라 진땀을 뺄 즈음 나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터부의식.
철저한 터부의식에 길들여져 온 지금의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촬영팀의 안내라는 명분으로 깨뜨릴 수가 있는 것인가. 금기의식에 익숙해진 부락민으로 과연 제주만이 들어가야 할 당숲을 드나들 수가 있는 것인가.
당숲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 년 수령의 거목으로 빽빽한 숲이었고 그 숲 심장에 해당하는 곳에 당집이 청석(靑石)으로 이끼만을 피운 채 묻혀있을 거였다.
부락은 너무나 고즈넉했다. 섬을 둘러싸고 흐르는 바다의 수면으로 달빛이 금물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간간히 해달 우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뒤를 따르며 촬영에 여념이 없는 일행도 가급적 침묵을 지켜주었고 제주(祭主)만큼이나 엄숙한 발걸음의 행보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당숲 입구에 하얗게 나풀거리는 게 있었다. 가슴이 꿍 내려앉는 것 같았다.
'금줄이야'
반 작가가 속삭이듯 그랬다. 금줄이었다. 부정한 사람들의 당숲 출입을 막으려고 새끼줄에 무명 쪼가리를 끼워 쳐둔 거였다.
당숲에서 써늘한 바람이 불어 나왔다. 고요한 들녘으로 그 찬기운이 빠져나가면서 부정한 사람들의 출입을 제지시키려는 듯 무명 헝겊을 날려댔다. 다른 계절의 밤에 수없이 쏟아져 나오던 밤새 울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뭔가 그들까지 숲 밖으로 내몰아 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자- 준비'
김 감독이 촬영 지시를 내렸다.
촤르르-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때를 맞춰 제주인 이장과 이장댁이 금줄 앞에서 머리를 두 번 조아리는 것으로 당숲 내 출입을 고하는 의식이 시작됐다.
두 양주가 숲으로 사르르 사라져 갔다. 뒤이어 촬영팀들도 이끌리 듯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그때 나는 반 작가의 출입에 대해 언급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뭔가를 주춤거리는 기색이었다. 명분은 타당했지만 출입에 지켜야 할 것에 그녀의 지식은 분명 해박할 거였다.
'안돼!'
나의 갈등을 누군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검은 그림자가 등 뒤에서 그렇게 소리를 쳤다. 낮게 땅을 울리는 소리였으므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숲의 어둠이 의식의 어둠으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그였다.
어느새 뒤를 따랐는지 거대한 그림자 하나를 이끌고 반 작가 옆에 붙으며, 중지를 입술에다 대며 그랬다. 그의 얼굴은 대단히 긴장되어 있었다.
반 작가 표정도 따라서 굳어져 갔다. 누구도 그의 그 명령을 깨뜨리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숲 속에서만 살아있던 어둠이 그녀의 얼굴에도 드리워지고 있었다.
완강하게 그는 이방인의 당숲 출입을 제지하고자 함이 역력했다.
'왜 그래?'
내가 눈으로 물었다.
창창한 달빛이 가시팽나무 가지에 의해 균열되어 그의 얼굴에 명암이 교번 하고 있었다.
'너도 잘 알잖아!'
그가 침묵의 대답을, 그리고 정곡을 송곳으로 쿡쿡 찌르듯이 무서운 눈빛으로 책망하였다.
'막았어야지!'
그러나 그의 눈빛은 다시 축축한 물기를 안으면서 풀어져 가더니 나에게로부터 돌아서 버렸다.
그의 등이 거대한 성처럼 보였다.
부락을 지켜야 할 우리들의 떠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들의 일탈, 그리고 부정의 행각들. 세세손손 대물림받아오던 섬의 계율을 날계란 깨어 마시 듯 깨어버리려 드는, 실망으로부터 오는 그의 슬픔.
'뭐 하고 있는 거야.'
숲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어둠과 함께 빠져나오면서 반 작가에게 그랬다.
김 감독이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미스반.'
짜증을 잔뜩 묻은 음성이었다. 반 작가가 그를 고개로 가리켰다.
그는 길섶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날이 풀리면 고기잡이 나설 어선들의 풍어와 무사를 기원하고 있는 당제의 의식이 부정으로부터 구제되기를 기도하고 있을 거였다.
그의 거부는 김 감독도 어쩌지를 못 하였다.
너무나 엉뚱하였고 예측하지 못한 벽에 부딪힌 김 감독이 반 작가의 메모 노트만을 챙겨 원시의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즈음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광기가 너무나 가슴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출현과 거대한 책망의 벽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조명하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어둠은 등 뒤로 몰려가 버렸고 나는 그의 나지막한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여야 했다.
'들어가 봐 삼촌'
그가 나의 등을 떠밀었다.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스르르 그의 주문에 이끌려 나는 일어섰고 그의 힘에 의해 금줄의 경계선을 넘고 있었다.
'들어가 잘 지켜봐. 삼촌은 앞으로 부락을 지켜야 할 사람이잖아.'
바람소리였다.
어둠은 왈칵 시야에 달빛 대신에 닥쳐왔지만 내 의사대로 걷고 있지 않은 이상 두 발은 제주가 깔끔하게 쓸어 둔 당숲 길을 잘 걸어가고 있었으며 내가 두고 온 어둠 밖 세상에 남은 두 남녀는 금줄에 걸려 나란히 앉아 있게 되었다.
하늘도 땅도 모든 게 어둠의 세계에 매몰되어 버린 듯 당숲의 세계는 어두웠으나 나는 용케 당집까지 당도해 내었다.
아무도 접근해 들어가는 나의 존재에 대해 주의를 두지 않았으며 너무나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제 몫들의 행동들을 치러내고 있었다.
위패는 향나무로 만들어져 '神位堂祖(신위당조)'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내가 멀찍이 나 앉게 되고 그들만의 행위에, 의식에 함몰되어 있던 제주와 촬영팀이 허리를 툭툭 두드릴 때에사 다시 나는 어둠 밖에 남겨진 두 남녀를 떠올리게 되었고 어둠 밖 세상 쪽으로 눈을 주었다.
그와 반 작가.
속으로 고개를 둘레둘레 흔들었다.
관심에 있던 제 의식은 의미가 없었다. 뭔가 그의 그 완강한 눈에서 쏟아져 나오던 빛의 정체는.
나는 당할아버지의 분노였다는 것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건 그에게도 반려자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明
글을 여기에 옮겨 적으면서 당시의 상황이 하나하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당제를 모시는 신성한 의식의 공간에 들어가 함께 하면서 겪는 갈등과 그리고 그걸 제지하려 했던 당시의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달해 주려고 했던 메시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지금에야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