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느라 고생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올 한해 댁내 두루 평안하시옵고 늘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곱창김’
기인 명절 연휴에 들어갑니다.
어제 같은 날에는 퇴근을 할 양이면 지하철이 아무리 복잡해도 손에 무엇이라도 들고 퇴근을 했어야 의기양양한 모습이 아니었을지요. 그래야 적어도 명절을 앞둔 들뜬 분위기를 실감할 수가 있었을 겁니다.
주로 한과세트, 명절 때 쓸 식용유, 주류, 참치 통조림 세트, 건어물 세트, 김 선물 세트 등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승객들을 아직은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빈 손으로 귀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물 세트가 마트에 진열되어 있던 시절도 잠시 잠깐 지나가 버렸고 이제는 불경기이기도 하거니와 명절 선물 문화가 없어져서 예전만 하지 못해서 여엉 명절 분위기가 나지 않는 거 같습니다.
이제는 어디나 선물을 주고받고 하는 풍속은 없어진 거 같습니다.
모든 것이 급여에 포함되어서 간단명료해졌습니다. 명절 상여금 이외에 회사와 직원 간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막내 딸아이가 인턴으로 잠시 근무를 하고 있는 데서 귀한 명절 선물을 받아 왔습니다.
‘곱창김‘ 이었습니다.
선물세트를 또 나눠 주더라며 저녁 퇴근길에 들고 왔습니다. 요새 우리 식구들은 김을 맛나게 먹고 있는 참이어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직장이 있고 문화가 남아 있는 것에 환호를 했습니다.
저는 딸아이에게 어쩌든지 인턴을 마치면 그곳으로 취직을 하는 게 좋겠다고 거들었습니다.
우리는 딸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누구에게 감사의 표시로 나눠주는 이런 선물 문화가 남아 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 선물을 마련한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그 금액이 문제였겠습니까? 명절을 앞둔 선물을 보낸 이의 마음이 부러웠던 겁니다. 아직도 직원들을 챙기고 있는 그 직장 문화가 부러웠던 겁니다.
명절 선물을 주던 풍속 대신에 명절 상여금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한숨을 내어 쉽니다.
그것은 거의 절반은 세금으로 떼어가고 난 뒤의 반절만 받아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명목은 명절 상여금에 담아서 회사는 직원들에게 명절의 감사의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데 그 절반의 몫은 나랏돈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실은 감사의 마음은 잠시이고 그 절반을 가져가는 제도가 야속까지 합니다.
전례 없는 불경기에 올해에는 그마저 없는 회사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시절이 많이 변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주변에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거 같습니다.
‘머언 길 고향 가는 길‘
저는 포항에서 10여 년을 그리고 울진에서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포항에서는 총각생활이었고 울진에서는 신혼부터 아이들 셋을 낳고 키웠습니다. 모두 직장생활 중이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어쩌든지 고향 쑥섬행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귀성행렬이 장사진을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중에 울진에서의 귀성은 말 그대로 먼 길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 셋을 데리고 엘란트라의 트렁크에 이런저런 선물들이며 이동 중에 먹을거리와 짐보따리 등을 잔뜩 싣고 울진에서 부산까지 내려가는 7번 국도의 그 구부렁대는 국도길을 지나 다시 부산에서 순천을 거쳐서 고흥까지 이르는 길은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하룻만에 이동이 어려웠기에 부산에 처갓집에 들러서 1박을 하고 난 뒤 명절 바로 전날에 장인 장모님께 미리 인사도 드리고 작은 선물과 용돈을 드리고 아이들 세배도 드리게 하고 다시 먼 길을 나섰습니다.
남해안 고속도로의 그 먼 길로 접어들면 창원 즈음에서 정체와 지체를 거듭하다가 다시 순천즈음에서 고흥으로 들어가는 국도길은 또 얼마나 많은 차량들이 밀려 있던지요. 그 차량행렬들은 바로 고향행을 이루고 있는 귀성인파였을 겁니다. 모두 타지에서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향하는 차량행렬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쑥섬은 나로도까지 도달했다고 다 온 것이 아닙니다.
나로도항에 도착을 하면 우선 다시 선물을 살만 한 곳을 찾고 또 쑥섬에 건너가서 아이들 군것질 거리며 우리 다섯 식구가 머무는 동안 먹어야 하는 이것저것에 친지들에게 그나마 드려야 할 이런저런 선물도 준비를 다시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셋에 짐보따리에 선물보따리에 그리고 적어도 삼치 한 마리는 큰 놈으로 사서 들어가야 모처럼 쑥섬에서의 횟감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기에 명절 음식용 이외의 생선도 한 두어 상자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룻배가 건너가야 하는 시간까지 기다리든지 나룻배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차대’ 또는 ‘독선‘이라고 해서 별도의 선비를 지불하고 한번 더 운행을 해 달라고 해야 했습니다.
쑥섬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오전에 두 번 오후에 두 번 나룻배가 오갔기 때문에 한번 무어라도 사러 나오면 한나절은 금방 가 버렸기에 한번에 생필품을 사가지고 들어가야 명절 준비도 하고 여러 식구들 몇 끼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쑥섬을 비롯해서 남해안의 일부 지방에서는 차례를 전날 저녁에 지내는 풍속이기에 도착하는 날은 적어도 설날 전전날 저녀까지는 도착을 해야 차례 준비를 할 수 있었기에 어쩌든지 저녁답에는 들어가야 했습니다.
머언 여정에 고단한 명절 나기였고 다시 명절을 쇠고 성묘까지 마치면 처가에 인사를 하러 들러야 했기에 명절 날 점심을 먹고 다시 머언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나아가야 했습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를 쓰고 그 머언 길을 오갔을까요? 마치도 연어의 머언 회귀같은 본능이었을가요?
‘수락도 설화’
이 시는 1992년도 저의 첫 시집인 ‘돌부처 도서관 나서다 ‘에 실린 것입니다.
수락도는 나로도항에서 서북쪽으로 쑥섬과 사양도 사이에 보이는 유인도인데 설명절을 쇠기 위해 동래도에서 나로도 쑥섬으로 오는 뱃길에서 수락도를 건네다 보며 쓴 시입니다.
지금이야 나로도가 제1나로대교인 연육교와 제2나로대교인 연도교가 놓여서 자가용으로 손쉽게 나로도를 들어갈 수가 있지만 다리가 놓아지기 전에는 동래도에서 나로도 축정항으로 가는 도선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나로도로 가기 위해서는 여수에서 여객선을 타고 나로도항까지 가는 해상로가 있었고 육로로는 고흥을 경유해서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는 동래도 선착장까지 내려와서 다시 배를 타고 1시간 남짓 나로도 축정항으로 이동하는 도선을 타야 했습니다.
어느 해 포항에서 명절을 쇠기 위해서 고향행을 하던 때였습니다.
포항에서 내려와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서 다시 순천에서 고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는데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차를 놓치는 바람에 순천 도착한 후에 순차적으로 차 시간이 연계되어 있는 순천-고흥-동래도까지 시외버스를 제 때 타지를 못했습니다. 순천서 고흥을 경유하고 동래도까지 내려오는 시외버스를 타야 동래도에서 나로도항을 오가는 도선을 탈 수가 있었는데 순천에 도착하는 시간에 그 차를 타지를 못했던 겁니다.
고흥에 도착을 해서 택시를 타고 동래도까지 내려온 시간이 저물녘이었고 어쩔 수 없이 쑥섬에서 아버지가 배를 타고 태우러 와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늦게 도착해서 도선을 제 때 타지 못해 어둠 속에 남겨진 아들을 태우러 1시간 30여분을 쑥섬서 동래도까지 직접 배를 타고 왔던 겁니다.
‘반딧불 마냥 다가와선 타거라 ‘
동래도 뱃머리 어둠 속에 남겨져서 배를 기다리고 있던 아들과 어둠이 내린 동래도 앞바다까지 작은 등 하나에 의존해서 배를 타고 온 아버지가 선착장에 닿으면서 첫 상봉을 하는 그 장면입니다.
서로의 반가움은 어둠 속에서 확인이 안되고 다시 배를 돌려 쑥섬으로 향해야 했기에 부자는 다시 어둠 속 기관음 속에 묻혀 있는데 그 아들이 오른쪽 어둠 속에 우뚝 솟은 수락도의 모습과 아버지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쑥섬에서 건네다 보는 수락도는 늘 기개가 높고 멋진 기상을 가진 모습으로 보였기에 그 어둠 속 아버지는 영락없이 수락도의 그 높은 모습으로 아들에게 다가 왔음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대를 이어서 쑥섬을 지키지 못하고 머언 객지로 떠나가서 엉뚱한 삶을 살고 있음에 죄송한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명절을 앞둔 날이 되면 늘 그 수락도 옆을 지나가는 아버지와 수락도를 떠 올립니다.
동짓달 겨울 어느 날
늦게 내려온 아들을 태우러 어둔 뱃길을 나서서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과 타지에 나가 살고 있는 아들을 태우고 다시 쑥섬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둠 속 그날 수락도의 모습이었을지요.
수락섬의 그 높아 뵈던 기상은 바로 아버지가 저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모습이었는지요.
'하늘 마냥 높이 서선 오느라 고생했다'
이제 어디에 가서 그렇게 반기는 부모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을지요.
설날 명절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닫는 수많은 귀성인파들의 행렬을 뉴스에서 보면서 그들을 반겨 맞을 고향의 부모님들의 정겨운 모습들이 떠 올립니다.
아직도 손에 손에 선물세트를 들고 서울역으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모두 설 명절 잘 보내시고 무사하게 귀경길로 오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