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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이야기(38)

삼촌과 조카(4) - 결혼이야기

by 명재신

삼촌과 조카(4)

- 결혼이야기



"나 이번에 결혼해"


회사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황사가 지독한 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무실로 들어선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전화선을 타고 그렇게 전해져 왔다. 봄이 오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현장이 있는 곳이 바닷가여서 칼바람은 겨울바람만 같았다.


"못 내려오제?"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너무나 차분한 목소리로 그랬다.


"내려갈라고 하네. 나 많은 조카가 결혼한다는 데"


"결혼한다고 이야기는 해얄 거 같아서."


쑥섬 '본마당/보리마당'에서 문중 어른들과 쑥섬사람들 모시고 혼례를 치를 거라며 그는 한사코 내려올 것까지는 없다고 했지만 '본마당/보리마당'에서 결혼식을 할 거라는 말에 시간을 내서 내려가 보고 싶어졌다.


얼마 만에 쑥섬 ‘본마당’에서 하는 결혼식이던가.


쑥섬에는 두 개의 '본마당'이 있었다.


하나는 '안몰짝 본마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건몰짝 본마당'이었는데 '본마당'은 마을의 행사를 하는 동네 공용마당이었다.


쑥섬에는 논이 없었다. 쑥섬은 경작지가 넓지를 않고 평평한 농지가 없었던 이유로 모두가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주로 보리농사나 마늘농사를 짓는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보리농사는 제법 많이 지었다.


그래서 보리 추수철이 되면 모든 집에서 일시에 추수를 한 보릿단들이 동네 마당인 '본마당'으로 집하가 되었고 거기에는 외지에서 임시로 들어온 커다란 휠이 달린 '얀마'라고 하는 내연기관에 벨트걸이를 달아 기다란 벨트에 연결된 탈곡기가 들어와 보리타작을 했는데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는지 '본마당 또는 보리마당'이라는 이름의 공용 마당을 두고 있었다.


그 공간은 마을에 초상이 났을 때 상여가 마지막으로 쑥섬을 떠나가는 공간이었고, 누구네 아들딸 시집장가를 보낼 때는 혼례식을 치르는 장소였으며, 조무래기들에게는 동네 놀이터였고 어른들에게는 동백꽃이 만개를 하는 영등사리 즈음인 사월 초순 경에 두어 날을 작정하고 장고를 치고 노는 '화전놀이'를 하는 흥겨운 놀이공간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마을의 규율을 어긴 사람을 엄벌하였다던 덕석말 이를 하던 지엄한 공간이었다.


"그래도 조카 메누리 얼굴은 봐야지?"


"알아서 해 그럼"


그의 신부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 그에게 인연이 닿았기에 느닷없이 결혼까지 진전이 되게 되었던 것일까. 그 자신의 수완으론 그 단계까지 가지는 못할 거였다. 어떻게 중신잡이를 통해서였던지 아니면 동네어른들이 나서서 중신을 섰을 거였다.


십여 년 전에도 집안 형님이 안타까운 사고로 배에서 일찍 돌아가시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계시던 형수님에게 나서서 다시 짝을 맺어주어 마을에서 함께 살도록 했던 것도 다름 아닌 집안 어른들이었다.


그의 눈먼 돈을 우려먹으려는 이들이 몇 번을 중신을 섰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더러는 그의 분재를 욕심내는 이들이 중신의 대가로 분재를 건네받은 적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대개가 성사가 되지는 못했는지 수형(樹形) 좋은 분재만 떠나보내고 말았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그의 결혼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인연이 닿게 된 여인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대단한 관심거리였고 그리고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봄바람 살랑이고 유채꽃 사방에 잔뜩 피어나 있을 쑥섬의 ‘본마당’의 마지막 축제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의 결혼 즈음에 현장에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나는 쑥섬에 내려가지 못하고 말았다.


결혼 선물로 사두었던 작은 선물과 축의금도 인편으로 건넬 수밖에 없었다. 뱃머리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그의 그림자가 자꾸 눈에 밟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을 동백꽃길에서 한 아름 동백꽃을 꺾어다가 그의 신부에게 꽃다발을 선사하게 건네주고 잘 익은 ‘뻘뚝/산수유열매’을 따서 예식을 마치고 나오는 쑥섬의 '본마당'을 한 바퀴 돌고 있는 신랑신부에게 뿌려서 ‘뻘둑 세례’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려가지 못하고 말았다.


"선물 잘 받았긍 마"


전화라도 넣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은 다시 현장 사고수습에 매달리느라 밀쳐졌고 그의 전화를 받고서야 나는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그는 그게 아니라며 마음을 알고 있으니 다녀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면서 그가 나를 오히려 위로하려고 했지만 나는 쑥섬의 마지막 축제에 함께 하지 못했음에 절망했다.


"잘 살어. 그리고 행복하게. 응?"


지긋이 발목에 힘을 주어 땅을 밟으며 내가 그랬다.


잘 살았으면 싶었다.


죽음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그 트라우마로 바다로 다시 나서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왔을까.

그리고 분재를 키우며 그 속에서 파묻혀 살아오던 그가 이제는 천생배필의 좋은 인연을 만나 서른몇 해 남짓의 굴곡진 삶 그 자체를 이제 정리하고 어른 구실을 실팍하게 해서 아들 딸도 낳고 잘 살았으면 싶었다.


정말 간절한 바램이었다.


“암만 그래야제. 그럴거여 걱정하덜 말어."


남해안의 작은 섬 '쑥섬'의 '본마당'으로부터 그의 또렷한 음성 들렸다.



오른쪽 정자가 있는 그 공간이 '건몰짝/건너마을' '본부당/보리마당'이고 왼쪽 정자가 있는 곳이 '안몰짝/아래마을' '본부당'입니다.
오른쪽이 '건몰짝 본마당/보리마당'
이 공간이 마을의 모든 크고 작은 행사를 치루던 '본마당/보리마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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