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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Feb 13. 2021

[번역활동 1년째]10년간 덕질했던 역사를 돌아본 순간

율리시스 그랜트의 회고록 기획을 마치며

원래 에밀 졸라 작품 기획 과정을 다루려고 했다. 그런데 '[번역활동 1년째]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번역의 기술'이라는 글에서 '다음 편은 기획서를 쓰면서 겪었던 고난(?)을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내가 왜 역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꿈과 현실이 어떻게 괴리되어갔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기록하겠다.'라고 했었던 것이 기억났다. 전편에서 예정과 달리, 기획서를 쓰고 '난 뒤' 겪었던 힘들었던 점을 다루었으니, 이번에도 계획을 바꾸었다. 꿈과 현실이 괴리되어간 과정보다 내가 역사를 얼마큼 좋아했는지 기록해보고자 한다.



난 순수하게 역사를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시험이나 취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느끼고 즐겼는지 파악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역사는 공부하느라 힘든 내게 짐이 되기도 하고, 한 줄기 빛이 되어주기도 했다. 율리시스 그랜트의 회고록이 퇴짜를 맞은 지금, 역사는 번역기획서를 잘 쓰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면서 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짐처럼 느껴진다고 역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번의 실패를 기회로 역사를 재밌게 공부했던 순간을 돌이키기로 했다.


<명화로 보는 세계사>로 세계사의 흐름을 훑다

초등학생 때, 쉬는 시간에 학교 책꽂이에 있던 <명화로 보는 세계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대교에서 출간했던 책 같다. 당시 나는 한국사를 주로 공부하던 때라 다른 나라의 역사는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유화로 채색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흑사병을 쓸고 가는 사신의 번뜩이는 날, 백년전쟁 현장을 지휘하던 성녀 잔다르크, 조개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 '짐이 곧 국가다'를 외쳤던 태양왕, 깃발을 든 들라크루아 등. 다양했다. 그중 나를 매료시켰던 그림은 사냥터에 있는 왕의 모습이었다. 숲 속에서 쉬는 도중 찍은 수수한 그림이었으나, 그 속에서는 알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다. 마치, 허름한 옷을 입어도 눈에 띄는 연예인들 같달까. 이 왕은 영국의 찰스 1세. 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현군은 아니었던 듯싶다.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의회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강요하다가 결국 처형까지 당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책을 계기로 영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청교도 혁명-명예혁명-입헌군주제로 이어지는 '영국 혁명'에 관한 책(대표적으로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을 읽고 인터넷 서핑을 했다.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찰스 1세의 초상화. 화가의 노고가 느껴지는 그림인데, 정작 화가는 약속했던 금액의 절반만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출처: 매경이코노미)


<먼나라 이웃나라>로 쉬는 시간을 보내다

중학생이 되자, 크리스마스 선물로 <먼나라 이웃나라> 세트를 받았다. 내가 세계사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을 아신 부모님이 내게 주신 책이었다. 지금 보면 오류투성이지만, 당시에는 세계사에 목마른 내게 한 모금 물이 되어 주었던 작품이었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고 영국사뿐만 아니라 로마사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사는 영국 혁명 시리즈, 로마사는 포에니 전쟁, 삼두정치 시리즈였는데, 공교롭게 두 시기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자세히 다루었다(특이하게도, 영국에서 지겹게 다루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나 세계대전은 관심이 없다. 아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잘 다루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식민지배당하던 우리나라의 상황과 대비되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영국 혁명 때 처형당하는 왕을 보고 충격을 받고, 포에니 전쟁 때 알프스 산맥을 오르는 한니발의 근성에 감탄하고, 카르타고가 멸망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리고, 현명한 독재자 시저를 보며 멋지다고 생각하고, 황제 칭호를 받는 옥타비아누스를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했다(암살당한 시저와 대비되어서 그런 듯하다).



기초를 다졌으니 더 자세히 공부하자

<먼나라 이웃나라>로 영국사와 로마사를 개괄적으로 파악한 뒤, <이야기 영국사>, <로마인 이야기>, <로마제국쇠망사>로 역사의 세계에 더 깊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전부 다 읽지는 못했다. 중학생이었던 나한테 몇 권씩이나 되는 시리즈물을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의 장미> 같은 만화책은 10권 넘게 읽었는데, 정작 <로마인 이야기>는 2권째 되니까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지금, <로마인 이야기>에 쏟아진 혹평을 생각하면 빨리 하차해서 다행인 것 같다). 그래도 <이야기 영국사> 같은 1권짜리는 가뿐하게 읽고 <로마제국쇠망사>도 꾸역꾸역 읽으려 노력했다. <로마제국쇠망사>의 경우, 지금 돌이켜봐도 읽기 잘했다고 생각이 든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5현제 시대 이후 군인황제시대에 접어들면서 로마 제국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한 줄로 나온 로마제국의 쇠퇴기가 이 작품에서 자세히 나오기 때문이다. 검투사 황제 콤모두스부터 페르티낙스, 율리아누스, 셉티미우스 같은 군인황제들(다 못써. 너무 많아), 로마 제국을 중흥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까지. 특히, '호부견자'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의 약점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아우렐리우스는 현군이었지만, 사람을 지나치게 믿어서 문제였다. 심지어 탕아라고 불렸던 아들까지. 86일 동안 제위 했던 페르디낙스 황제가 콤모두스를 암살하면서 잠시 정국이 안정되나 싶었는데, 황제에게 충분히 보상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근위병이 황제를 독살하면서 군인황제시대에 접어들게 된다(페르디낙스는 그래도 로마를 부흥시키려 했는데 너무 일찍 죽어버렸어... 측근들 때문에).



고려사에 눈을 뜨다

고등학생 때 세계사와 동아시아사를 공부하면서 역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도표만 보면서 달달 암기하다 보니 정작 역사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특히 내가 제대로 덕질하지 않은 현대사는 정말 공부하기 힘들었다). 빨리 수능 보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 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드라마 <기황후>가 수능 직전에 방영하면서 고려사에 좋든 나쁘든 고려사에 관심을 가졌고 그 관심을 토대로 <왕은 사랑한다>라는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소설가라는 꿈을 키웠던 때도 이때였다(그리고 현재까지도 소설가라는 꿈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사(라 읽고 삼국지라 쓴다)라 불리는 신세계

내가 삼국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교 동아리에서 삼국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술자리에서 나는 대형사고를 쳤다. 강동의 호랑이를 손권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여자가 삼국지를 아네?"라고 반응했다. 부끄러웠다. 당시 나는 <삼국연전기>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일본이 여고생이 삼국 시대로 차원 이동해서 삼국지의 인물들과 연애를 하는 여성향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거기서 나온 유비, 조조, 손권, 제갈량 같은 인물들 이름만 대충 외우고 아는 척을 한 것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학교도서관에 가서 <삼국지>(이문열 판이 아니라, 김구용 판이다. 이문열 판도 왜곡 투성이라는 말이 많아서 다른 번역가분의 작품을 골랐다) 10권을 읽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방영한 <신삼국> 95부작을 보고 최훈의 <삼국전투기>를 읽었다(<삼국전투기>의 경우, 제갈량이 죽은 후부터 보았다). 원래 '삼국지'하면, 적벽대전을 자연스레 떠올렸으나 <삼국지>, <신삼국>, <삼국전투기>를 보고 난 후 기억에 남는 전투는 이릉대전이었다. 유비가 죽은 동생 관우, 장비를 위해 오나라와 전투를 치렀다가 촉나라의 멸망을 촉진시킨 사건. 왜 나관중이 유비를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알 것 같았다. <삼국지연의>가 단순히 촉나라 미화 작품이 아니라는 것도.


<삼국지연의>가 사실 손권 미화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연의에서는 말년에 손권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연의를 섭렵한 후, 최훈의 <삼국전투기>, 써에이스쇼의 <정사 삼국지>를 보고 실제 역사를 공부했다. 기억에 남는 사건은 고평릉 사변과 이궁의 변, 촉나라 멸망 직전 강유의 항쟁 등이었다. 고평릉 사변에서 사마의가 정권 잡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면서 멋지다고 생각했다. <삼국전투기>에서 욕을 먹던 사마씨 삼부자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조비가 헌제에게 했던 행동을 복수해 주는 느낌이라... 아무튼 사마의가 좋았다. 사마의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였냐면, 티빙에서 유료로 결제해서 사마의 드라마를 보려고도 할 정도였다. 이궁의 변을 보고 손권이 왜 '쥐새끼', '손제리'라 불리면서 조롱당하는지 알 것 같았고(그 전에도 실책이 많았는데 이궁의 변에서 제대로 터졌다), 손권 때문에 울화통 터져 죽은 육손 승상이 안타까웠다. 몇십 년 뒤, 촉나라를 끝까지 수호하려다가 종회와 난을 일으키려 했던 강유의 최후도 씁쓸하게 기억 남는다.



미국사는 생소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율리시스 그랜트의 회고록을 기획할 때, 미국-멕시코 전쟁, 남북전쟁에 관해 조사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 왜냐하면 미국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분야였기 때문이다. 번역 샘플의 경우, 그랜트 집안만 조사하면 되지만 목차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Battle of North Anna'는 번역하기 쉬웠다. 구글에 검색하면 바로 '노스 안나 전투'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Left frank movement across the Chickahominy and James'는 어떻게 번역할까? 사전에 'Chickahominy'를 검색하면, 'Virginia 주(州) 동부에 살던 북미 인디언 종족'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난 치카호미니를 사람으로 번역할 뻔했다. '치카호미니족을 물리치고 왼쪽으로 이동하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노스 안나 전투의 과정을 보고 치카호미니 강, 제임스 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치카호미니 강, 제임스 강을 왼쪽으로 가로질러 이동하다'라고 번역했다. 'Sheridan ordered to Lynchburg'는 뭐라고 번역할까? 셰리단이 린치버그에게 명령하다? 'Sheridan'을 사전에 검색하면 도시 이름으로 나온다. 그러나 남북 전쟁의 전개 과정을 조사하면, 'Sheridan'은 남북전쟁 때 북군의 장군이었던 필립 셰리든(1831~1888)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셰리든에 관해 조사하면, 그랜트(그랜트도 남북 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가 셰리든에게 동부 전선을 지도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린치버그는 버지니아주의 도시로, 버지니아주는 미국 동부에 있다. 그래서 'Sheridan ordered to Lynchburg'은 '셰리단에게 린치버그로 진격하라고 명령하다'라고 번역했다.




다음에는 에밀 졸라의 작품을 기획한 이유와 번역했던 과정을 다루겠다. 에밀 졸라가 활동했던 19세기 프랑스도 꽤 생소한 시기라 공부하기 어려웠지만, 막상 공부하니 재미있었다. 에세이라고 생각하고 쓰긴 했지만, 대부분 시시콜콜한 잡담과 쓸데없는 지식으로 범벅될 것 같다.


<참고도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3432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506075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32110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889754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6654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717475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261687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675240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83056


<사진 출처>

https://m.news.zum.com/articles/6642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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