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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Feb 08. 2021

[번역활동 1년째] 20곳에 제출했으나 고배를 마시다

율리시스 그랜트의 회고록을 번역하려 했지만...


서메리 선생님에게서 코칭을 받은 후, 번역기획서를 만들고 출판사 20곳에 제출했다. 그중 부정적으로 답변한 곳은 7곳이고, 남은 13곳에서는 답변을 주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답변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속 시원하게 알려주면 참 좋으련만, 출판사 기획자분들이 바빠서 그런지 자세하게 알려주는 분은 없었다. 그래도 간단하게라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다. 그분들마저도 없었더라면, 난 머리만 쥐어뜯으며 '넌 안 돼!'라고 자책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기획한 책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안 팔릴 것 같다. 우리 출판사와 결이 다르다. 흔하디 흔한 말속에 숨은 뼈아픈 가시가 내 심장을 쿡쿡 찔렀다.




율리시스 그랜트가 누구야?

내가 기획한 책은 율리시스 그랜트가 집필한 <The Personal Memoirs of General Ulysses S. Grant>이다. 미국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의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가 죽기 일주일 전에 자신의 생애를 집필한 회고록이다. 말이 좋아 생애이지, 미국-멕시코 전쟁과 남북전쟁 때 자신이 보고 느낀 것, 자신이 세운 공로가 대부분 내용을 차지한다.


나는 <율리시스 그랜트, 뉴욕에서 회고하다>를 제목으로, <기술자의 아들에서 50달러의 모델까지>를 부제로 정했다. 왜 부제를 설정했냐면 사람들이 율리시스 그랜트가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이니 잘 알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외서 수십 권을 접했던 현직 번역가들도 '율리시스 그랜트'라는 이름을 생소하게 여겼다. 우리가 아는 미국 대통령이 몇 명이나 되는가? 워싱턴, 루스벨트, 링컨, 케네디, 트럼프, 바이든, 오바마, 부시, 클린턴 등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마저 절반 이상은 20~21세기 대통령이다. 미국-멕시코 전쟁을 승리로 이끈 포크 대통령도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남북전쟁'도 대부분 링컨을 떠올리지, 누가 그랜트를 떠올리나?


그나마 그랜트에 대해서 한 가지 어필할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달러였다. 1913년부터 지금까지 그랜트는 미국 50달러의 모델로 활동했다. 비록 정계 말기에 부패 문제로 인해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썼지만, 남북전쟁 때 공을 세우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등 업적도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제에 '50달러의 모델'이라고 어필했는데... 이것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면 '안 팔릴 것 같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고민해보았다.


'남북전쟁'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링컨이다! 아무도 그랜트를 떠올리지 않는다. (출처: 픽사베이)



요즈음 회고록을 누가 봐?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설민석 강사의 역사왜곡, 논문 표절 논란, <철인왕후>의 조선 왕실 폄하 논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우경화 정책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역사왜곡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한국사를 강연하는 유튜브도 늘고 한국사 책을 리뷰하는 블로그도 많아졌다. 어디까지나, '한국사'에 한정해서 말이다. 그러면, 세계사는 희망이 없나? 그렇지 않다. <총균쇠>, <지리의 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사피엔스>, <7개 코드로 읽는 유럽 도시>,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등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세계사 책도 많다. 하지만 베스트셀러가 된 세계사 책은 크게 3가지 부류로 나뉜다. 방대한 세계사를 간략하게 소개한 책(<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독특한 주제를 메인으로 세계사를 재미있게 소개한 책(<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7개 코드로 읽는 유럽 도시>,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예전부터 읽혔던 고전(<총균쇠>, <지리의 힘>, <사피엔스>)으로. 실존인물의 회고록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가뜩이나 살기 팍팍한데 누가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딱딱한 회고록을 읽을까. 그나마 잘 알려진 고전의 경우만 간신히 읽지, 율리시스 그랜트라는 생소한 인물의 회고록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역사책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서도 '우리 출판사와 결이 맞지 않는다'라고 평했는데, 교보문고 매대를 잔뜩 채운 베스트셀러를 보면 그 이유가 잘 이해된다. '정확한 역사'를 콘셉트로 잡았으나, 이 책도 한 사람의 생각을 기록한 책이니 온전히 객관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그럼 어떤 책을 기획해야 할까?

출판사의 선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십 년 전에 세상을 뜬 인물이 쓴 책은 지루하고 매력적이지 않으니 최근 출간한 책을 기획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마존에 있는 책 중 90% 이상은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계약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검색만 해도 역서가 나오는 책도 상당수였다. 그나마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있는 책은 대부분 유명 작가이니, 그분들 책을 기획하면 될 듯했다. 생각보다 번역이 되지 않은 책도 많았고 설령 번역이 되었다고 해도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책이기 때문에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해도 법적인 문제가 없는 책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인기 있는 작품과 결부시키면 그나마 승산이 있지 않을까?라고 희망 회로를 돌려본다.


다음에 기획할 책은 에밀 졸라 작가의 작품이다. 에밀 졸라 작품의 경우, 대부분 불문과 교수님들이 번역하기 때문에 과연 내게 기회가 올진 모르겠다. 그래도 만일(교수님들이 다른 일정 때문에 바쁘시다고 할 경우를 대비해서)을 위해, 기획해보고자 한다. 에밀 졸라가 사회고발적인 작품을 주로 집필했던 건 대부분 아는 사실이 아닌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이유를 생각해보자고 다짐하며 또다시 도전한다. 장미에 가시가 많다고 장미 꺾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역경에 의기소침해져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


*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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