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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Feb 15. 2021

혼란한 무신 정권에 피어난 사랑

<화월송도>, 김이령

이 소설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러하다. '혼란한 무신 정권 시기를 겪으며 사랑을 나눈 연인 이야기'. 이렇게 놓고 보면, 단순히 사랑 타령하는 소설일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경인년의 난부터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까지 이어지는 무신 정권 초창기의 모습과 가상 인물들의 사랑이야기가 잘 어우러져 있다. 탄탄한 고증은 덤. 비록 후반부에 사건들이 휘몰아치면서 가상 인물들이 묻히는 감이 있지만, 한 권의 역사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하루에 3~4시간씩 총 일주일을 투자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1. 뒤바뀐 운명

소설의 도입부는 꽤 강렬하다. 산속에서 노파가 어떤 젊은이에게 느티나무로 유명한 집안의 큰아들 제온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노파의 말에 따르면, 13년 전에 느티나무 집으로 아이를 받으러 갔을 때 마님의 아이와 여종의 아이가 뒤바뀌었다. 장면이 바뀌고, 도련님과 노비 관계로 살고 있는 제온과 영로가 나온다. 비록 귀한 집 아들이지만 문란하고 계산적인 아버지와 광기에 빠진 새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사는 제온에게 영로는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을 아는 자가 나타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소설 중반부에 접어들면, '어떤 젊은이'와 '출생의 비밀을 아는 자'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그 자는 과거 산에서 제온을 납치하려 했던 자였으나, 제온의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 그때부터 제온에게 칼을 갈아온 그 자는 제온에게 복수하기 위해 영로에게 접근한 것이다. 영로는 그 자에게서 면천될 기회가 있다고 듣는데... 영로는 그 자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2. 출세의 기회

11세기 고려는 원래 문벌 귀족 중심의 사회였다. 왕은 태어날 때부터 왕이고, 귀족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으로서 대접받는다. 무신은 문신들에게, 노비는 귀족들에게 천대받는 사회였다. 그러나 경인년의 난을 계기로 무신들이 집권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천민도 귀족이 될 수 있고(노비 출신이었던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기까지 했다), 귀족도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권력이 수시로 바뀌는 시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라고 생각한 돌연변이 귀공자 제온은 석령사 등의 난적들과 함께 탐욕을 일삼는 무신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개경을 접수하려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제온은 경대승이라는 무인을 만나기도 하는데,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떠했는지는 직접 보시라(청렴하면서 고지식한 경대승과 다소 한량 같은 제온의 모습이 참 일품이다).


노비 영로도 출세의 기회를 얻어 무인으로 승승장구할 기회를 얻는다. 제온 곁을 떠나기 어려웠던 영로는 그 기회를 마다하지만, 홍규직과 재혼한 여인 서아를 만나고 그녀가 무뢰한 남편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는 것을 알자 영로는 면천의 길을 선택한다. 면천되면 주인과 노비의 관계에서 벗어나 남녀로서,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영로를 면천되게 해 준 사람은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었다. 벗이라 할 만큼 친했던 제온과 영로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 두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3. 역경 속의 사랑

그래도 이 소설의 중심은 어사대부 임진출의 딸 운영과 지문하성사 홍규직의 아들 제온의 사랑 이야기다.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다친 운영을 위해 제온은 자신의 옷을 뜯어 운영의 상처를 감싸주었다. 망나니 같은 아이였지만 그 속에서 처연함을 느꼈던 운영은 그 날 이후 제온의 옷을 팔찌로 만들어, 평생 간직한다. 사랑의 징표로 여기면서. 몇 년 후, 운영과 제온은 다시 만난다. 경인년의 난, 문신의 관을 쓴 자는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겨서는 안 되었던 시대. 다행히, 제온과 친한 무신 오광척 덕분에 두 사람의 집안은 간신히 살아나지만, 다른 노선을 탄 아버지들 덕분에 사랑을 이루기 쉽지 않다. 서로 엇갈리기만 하던 그들이었으나, 김보당의 난에 휩쓸려 운영 집안이 몰락하고 제온은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뒤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귀한 집안 자식들이었다가, 한 순간에 몰락하게 된 두 사람. 과연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김이령 작가님의 책을 읽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고등학생 때 <왕은 사랑한다>를 읽고, 대학생 때 <열두 달의 연가>를, 그리고 지금 <화월송도>를 읽었다. <왕은 사랑한다>가 묵직한 사운드 뮤직 같다면, <열두 달의 연가>는 아기자기한 소품, <화월송도>는 번듯하게 깔맞춤한 서랍 속에 숨어 있는 알사탕 같다. 탄탄한 이야기 중심으로 전개하는 작가님이다 보니, 중간중간 지루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반부로 치달일수록, 휘몰아치는 스토리에 빠져드느라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아쉬움이 커져갔다. 마치, 시간을 멈췄으면 좋겠달까.

 

비록 주인공들의 성격은 평면적이라서 매력이 좀 덜하지만 조연 인물들의 활약 덕분에 스토리가 살아난 것 같다. 특히, 청렴한 무인으로서 고려를 바로 세우려 했지만 정권을 잡은 뒤 두려움에 빠져 살다가 일찍 목숨을 잃은 경대승이 눈에 들어왔다. 청렴하지만 고지식하기도 했기 때문에 천비의 자식이었던 제온과 남적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인물. 양면성을 지녔기 때문일까. 더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경대승의 결말도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들은 해피엔딩이었지만, 일찍 죽은 경대승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영로와 서아의 사랑도 기억에 남는다. 부모의 강요 때문에 억지로 홍규직과 혼인했지만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서아와 우직하면서 한 사람만 바라보는 영로. 혼란스러운 무신 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고초를 겪었지만, 영로가 면천의 기회를 얻고 제 자리를 찾은 것도, 서아가 재혼할 수 있었던 것도 무신 정권이라는 시기 덕택인 것 같다. 살육이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와 천한 사람에게도 출세의 기회가 보장되었던 무신 정권 시대의 양면성이 두 사람의 결말에서 잘 드러난다. 운영과 제온, 영로와 서아가 최 씨 정권과 몽골 전쟁 시기 속에서도 잘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남기고 마치도록 하겠다.



제온의 입술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운영은 그 입술에 따뜻하고도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2권 p.306


<참고도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219442


*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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