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왕가 찰스 1세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2)(영국)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사방을 둘러싼 적
1632년, 어떤 변호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여배우들더러 '난잡한 창녀'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여배우에 헨리에타도 포함되었죠. 그러자 격분한 찰스는 그 변호사의 귀를 잘라버립니다. 내 가족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서요. 2년 전에 스코틀랜드 의사도 헨리에타를 비난한 혐의로 채찍질을 당했죠. 왜 사람들은 헨리에타를 증오했을까요? 그녀가 적극적으로 가톨릭을 옹호했기 때문입니다. 1편에서 언급했듯이, 헨리에타는 박해당하던 가톨릭교도에게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어요. 가톨릭교도를 위한 예배당을 신설하거나 죽은 신부를 위해 미사를 드리기도 했죠. 또한 가톨릭에 관련된 내용으로 연극을 했고요. 하지만 당시 의원들 대부분은 청교도 신자였고 다른 종교를 믿는 왕비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겁니다. 또한 찰스 1세의 정치적 행보에도 문제가 있었어요. 1630년대, 찰스는 의회 없이 홀로 정치했죠.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신하들이 없어지니 살 판납니다. 이제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게 됐어요. 혼자가 된 찰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해군력을 보강하는 것이었어요. 여러 차례 전쟁에서 패착을 거둔 탓에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느낀 거였죠. 근데 군대를 양성하려면 세금이 필요합니다. 또한 '서민에게 자애로운 군주'가 되기 위해 빈민 구호, 실업 정책 등을 펼쳐야 했고요. 결국 세금을 늘리니, 상공인이나 지방 유지들 중심으로 반발이 강해집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종교입니다. 찰스는 영국 국교회 신봉자로 청교도 신자들이었던 의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죠.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11년 만에 의회가 소집되다
잠시, 영국 영토에 대한 얘기를 할게요. 영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과 아일랜드 북쪽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선왕 제임스 1세 때부터 잉글랜드 국왕이 네 개의 섬을 다스리게 되었죠. 하지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가 그레이트브리튼으로 통합된 시기는 1707년, 아일랜드가 연합한 시기는 1801년으로 찰스 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각자 독자 행보를 걷고 있었어요. 당시 찰스는 네 개의 섬이 국교회로 하나 되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스코틀랜드 교회에 국교회를 강제로 전파하려 했죠. 스코틀랜드는 장로회(개신교의 또 다른 교파)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어요. 1639년, 찰스 1세의 강압적인 정책에 반발한 스코틀랜드인은 반란을 일으킵니다. 찰스는 혼자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대패했죠. 1640년,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음모의 중심에 놓인 왕비
하지만 의원들은 10여 년간 울분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숨통이 트인 의원들은 찰스 1세의 측근들을 탄핵하고 찰스 1세가 펼쳤던 정책들을 갈아엎었습니다. 그리고 의회는 최소 3년에 한 번은 열려야 한다는 규칙을 제정했죠.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설상가상으로 1641년 가을, 아일랜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납니다. 아일랜드는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데, 찰스가 국교회를 믿으라고 강요했기 때문이죠. 그러자 의원들은 찰스 1세를 압박하기 위해 헨리에타를 이용합니다. 당시 찰스와 헨리에타의 사이가 좋아지면서, 찰스가 헨리에타의 조언을 듣는 경우가 늘어났어요. 그러면서 헨리에타의 국정 참여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됐죠. 가톨릭을 믿었던 헨리에타와 청교도를 믿는 의원들 사이 갈등이 심해집니다. 찰스 1세의 위세가 약화된 틈을 타, 존 핌이라는 의원은 아일랜드 반란에 헨리에타가 개입되어 있다는 음모론을 퍼뜨렸어요. 그리고 1641년 11월, 의회는 찰스의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는 결의문을 통과시킵니다. 결의문에 따르면, 찰스 1세의 가톨릭에 관대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어요. 헨리에타를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 헨리에타에게 감화된 찰스는 가톨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으니까요. 이에 격분한 찰스는 군사를 이끌고 의회에 난입합니다. 그러자 의원들은 경비병을 동원해 진압해버립니다. 이때 헨리에타는 찰스에게 의회 의원들을 체포하라고 부추겼다고 해요(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출처: 위키백과 영문판).
내전의 시작
1642년 8월,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자신의 깃발을 걸고 군대를 이끕니다. 헨리에타는 1642년 1월에 미리 대륙으로 가서, 민심을 완화시키고 자금을 모으고 있었죠. 네덜란드와 덴마크 왕을 찾아가 찰스의 대의에 협조해달라고 청했고요. 하지만 쉽지 않았어요. 눈물을 머금고 보석을 팔려고 해도, 너무 비싸서 쉽게 팔리지 않았거든요. 사람들은 영국 의회와 마찰이 생길까 봐 그녀와의 협상을 꺼렸고요. 결국 어찌어찌해서 소량의 보석을 팔고 군대를 빌렸으나 영국 언론에서는 '국민들을 죽이기 위해 왕실의 보석을 외국에게 파는 왕비'로 묘사합니다. 가뜩이나 안 좋았던 그녀의 평판은 더 악화됩니다.
마지막 만남
1643년, 헨리에타는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상륙합니다. 국경 북쪽에서 스코틀랜드 왕당파를 만나 봉기 계획을 세웠죠.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고 왕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합니다. 사실 화해의 여지가 있긴 했어요. 존 핌을 비롯한 의원들은 헨리에타에게 찰스를 설득시켜달라고 빌었으나, 헨리에타는 완강하게 거부했죠. 결국 그녀는 의회에 의해 탄핵당합니다. 의원들은 그녀가 세운 예배당을 파괴하고 신자들을 체포했죠. 한편 헨리에타는 남쪽으로 향하던 중, 찰스를 다시 만납니다. 두 사람은 야외에서 식사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옥스퍼드에 도착해 예전과 같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요. 하지만 1644년 7월, 올리버 크롬웰의 등장으로 왕당파가 패배하면서 옥스퍼드가 위태로워집니다. 공주를 임신한 헨리에타는 서쪽으로 퇴각하기로 했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옥스퍼드를 여행한 후 헤어집니다. 이후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죠.
왕당파의 패배, 찰스 1세의 운명
1644년 7월, 헨리에타는 아이를 낳은 후 자식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피신합니다. 한편 찰스의 위세는 약해져갔고 자금을 더 필요로 했죠. 헨리에타와 찰스는 서신을 교환하는데, 서신이 유출되자 여론은 걷잡을 수없이 악화됩니다. 결국 찰스는 두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코틀랜드로 피난을 갔죠. 하지만 찰스 1세를 싫어했던 스코틀랜드는 돈을 받고 크롬웰에게 찰스 1세를 넘겨 버립니다. 의회에서는 찰스 1세를 처리할 방법을 둘러싸고 내분이 발생했죠. 1647년 12월, 온건파 측에서 평화 협정을 게시하기도 했으나 찰스 1세는 완강히 거부했죠(헨리에타는 이 소식을 듣고 불안해했다고 해요. 남편의 운명을 예측한 걸까요?). 1648년, 찰스는 이틈을 타 다시 전투를 벌입니다. 소식을 들은 헨리에타는 군사를 지원해서 찰스 1세를 구출하려 했으나, 왕당파 군대는 머지않아 진압당하죠. 더 이상 왕을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한 크롬웰은 왕의 처형을 반대하는 의원들을 가둔 뒤 남은 의원들로 의회를 편성합니다. 그리고 1649년 1월, 찰스 1세는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최고법원에 회부됩니다.
검찰 측은 찰스 1세가 폭정을 휘둘러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찰스는 주권자의 권리는 무한하니 나는 죄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법정은 10일 만에 사형 판결을 내렸죠.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죠. 찰스 1세는 판결을 듣고 군중 앞에서 마지막 연설을 합니다. 연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I must tell you, A subject and a sovereign are clean different things. If I would have given way to an arbitrary way, for to have all laws chang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word, I needed not to have come here, and therefore I tell you that I am the martyr of the people."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신민과 통치자란 완벽하게 다른 존재다. 만약 짐이 모든 법률을 좌지우지하는 검의 힘으로 독단적 정치를 했다면, 여기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짐은 국민의 순교자다!"
- 찰스 1세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
국민들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개인과 군주의 권리는 다르니, 의회가 군주의 권리를 넘볼 수 없다고 주장했죠. 왕권은 신이 부여한 것이니까요. 찰스 1세는 당당했습니다. 처형되는 날 아침, 자식들에게도 "이 아비는 죄를 지은 것이 없단다"라고 말했다고 하죠. 그리고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국민의 손에 의해 처형당합니다. 프랑스에 있던 헨리에타는 남편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지죠. 비탄에 잠긴 그녀는 평생 검은 옷을 입고 남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1651년 수녀원을 건립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했죠. 그녀에게 남은 사람은 자식들뿐이었습니다. 헨리에타는 자식들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키우면서, 장남 찰스가 왕위에 오르기만을 기원합니다.
헨리에타의 운명
찰스 1세가 처형당한 후 영국은 공화정이 됩니다. 크롬웰은 호국경(요즘의 대통령 같은 느낌이지만, 영구 통치했죠. 왕처럼요)의 자리에 올랐으나 예전 왕과 다를 바 없는 독재를 펼쳐 국민들의 반감을 삽니다. 결국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고 2년 뒤, 장남 찰스가 찰스 2세로 즉위하면서 왕정이 복고합니다. 헨리에타는 왕의 모후가 되어 영국으로 돌아갔죠. 다른 자식들을 데리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모습을 지켜봅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0세였죠. 나이 든 그녀는 연금을 받으며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프랑스로 돌아가고, 1669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헨리에타의 시신은 생 드니에 안치되었습니다. 프랑스 왕족들이 묻히는 묘소이죠. 프랑스 왕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증거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프랑스에서 그녀가 받았던 대우를 생각하면 애매합니다. 헨리에타는 프랑스에서도 환대 받지 못했거든요.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곳인 루브르 궁에 머물렀지만, 루브르 궁은 헨리에타가 떠난 후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았죠. 결국 그녀는 버려진 궁에서 방치된 채 곤궁하게 살았어요. 조카 루이 14세가 처형당한 왕의 아내인 헨리에타를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말년에 프랑스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편이 처형당한 곳에 머무르기 불편했던 것일까요, 만인의 축복을 받았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던 것일까요? 어쩌면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자식들을 가톨릭 신자로 키워낸 게 그 증거죠(나중에 가톨릭 때문에 자식 한 명이 비참한 운명을 맞이합니다). 남편을 착실히 내조하고 왕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시대가 시대인 탓에 아집으로 몰린 그녀의 신념. 종교의 자유가 생긴 21세기에는 그녀의 신념을 존중할 기회가 생겼으면 합니다.
<참고 자료(1,2편 통합)>
Wikipedia, Henrietta Maria, https://en.wikipedia.org/wiki/Henrietta_Maria
위키백과,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 https://ko.wikipedia.org/wiki/%EC%95%99%EB%A6%AC%EC%97%90%ED%8A%B8_%EB%A7%88%EB%A6%AC_%EB%93%9C_%ED%94%84%EB%9E%91%EC%8A%A4
Fascinate, Doomed Facts About Henrietta Maria, The Fugitive Queen, https://www.factinate.com/people/facts-henrietta-maria/
프랑스 왕과 왕비, 두 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90983&cid=62117&categoryId=62117
두산백과, 헨리에타 마리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26694&cid=40942&categoryId=34317
유럽 왕가, 루이 13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52078&cid=56790&categoryId=56791
나무위키, 찰스 1세, https://namu.wiki/w/%EC%B0%B0%EC%8A%A4%201%EC%84%B8#rfn-2
유럽 왕가, 찰스 1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26623&cid=56790&categoryId=58124
네이버캐스트, 찰스 1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67741&cid=59014&categoryId=59014
Wikipedia, William Prynne,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Prynne
한국민족문학대백과, 영국,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57870&cid=47304&categoryId=47304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