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55주년 전시 Part 2
국내 근대화가들에 대한 일화를 읽다 보면 화가가 아닌데도 그만큼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갤러리현대 1세대 화랑주인 박명자 회장이다. 1970년 4월 4일 인사동에서 현대화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현재까지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화랑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갤러리현대는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교류하고 신진작가들을 후원하며 컬렉터들을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특히 이건희 컬렉션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과 함께 큰 기여를 하였는데 홍라희 여사도 전시를 보러 직접 갤러리현대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현재는 박명자 회장의 차남인 도형태 부회장이 그 뒤를 이어 갤러리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그런 갤러리현대의 지난 역사와 함께 한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55주년 한국현대미술의 서사> 전시가 삼청동에서 열렸다. 지난 4월 8일부터 5월 15일까지는 Part 1, 5월 22일부터 7월 6일까지는 Part 2로 나뉘어 열렸던 이 전시는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 두 공간에 걸쳐 동시에 개최되었으며 갤러리현대와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여러 작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55주년: 한국현대미술의 서사 Part 1> 본관 전시는 한국 1세대 모더니스트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도상봉,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이대원, 최영림 등 1941년 이전 출생 현대적 구상회화 작가 24명의 대표작 50여점으로 꾸며졌다. 신관에서는 2세대 화랑주인 도형태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갤러리 프로그램에 관여하며 시작된 "한국 실험미술 작가 다시보기"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작가들과 도형태 부회장의 뉴욕대학교 대학시절부터 파리 유학 시기에 인연을 맺어 온 디아스포라 작가들 총 12명의 대표작 180여 점이 소개되었다.
올해 7월 6일까지 열렸던 part 2 본관 전시는 김환기, 이성자, 김창열, 이응노 등 주로 프랑스에서 인정받고 활약했던 작고 작가부터 현재까지도 건재한 이우환, 정상화, 곽인식 등 추상양식의 작가들 총 22명의 대표작 40여점이 걸렸고 신관에서는 역시 Part 1 때와 마찬가지로 도형태 부회장이 갤러리현대 경영 전면에 나서며 함께 하게 된 1950년대생부터 1980년대생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작가 18명의 대표작 50여점이 소개되었다. 국내 거장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본관 전시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Part 2 신관 전시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김성윤 작가의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김성윤 작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2019년 6월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박서보의 대규모 회고전을 보고 나와서 걸어가다가 아무 정보 없이 우연히 들어간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들을 보며 충격과 전율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람되지만) 같은 날 관람한 누구나 인정하는 대가 박서보의 작품들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김성윤이라는 젊은 작가의 이름 세 글자만 뚜렷하게 각인되었던 순간이었다.
일단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의 스킬이다.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없이 그냥 너무 잘 그린다.
수없이 보아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장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게 꽃그림이었는데 꽃을 그린 작품이 이렇게전율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그의 꽃 정물화는 그저 아름답다를 넘어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차마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마도 고전주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아 차용한 정물화 기법, 17세기 플랑드르에서 성행했던 바니타스적 요소인 시들어가는 꽃과 벌레등의 디테일 때문인지 종교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이번 55주년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부터 시작한 꽃 정물화 연작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꽃이라는 소재의 아름다움도 표현하고 있지만 그간의 작업 변화를 살펴보면 같은 소재의 변주를 통해 여러 방법론을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주의적 양식은 여전하지만 이번 신작에서는 화병의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하거나 흘러내리게 표현하기도 하고 꽃에 캐릭터 얼굴을 중첩시키기거나 꽃의 일부가 연기가 되어 흩어지게 하는 등 현실과 디지털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동시대적 미학을 선보인다.
그는 꽃에 쏟는 정성만큼 그를 담아내는 화병에도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아내와의 일상에서 영감을 받은 상품 로고가 새겨진 유리병부터 동료 도예가인 유의정 작가의 작품들을 화병으로 응용하기도 했다. ‘구글링’을 통해 동일한 시기와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꽃들을 한데 모아 우리나라 전통 도자기이지만 현대미술의 재기발랄함도 돋보이는 화병에 담아낸 게 특징이다. 본격적으로 꽃이라는 주제에 천착한지 10년이 채 안 된 작년 ‘프리즈 LA 2024’에서 그는 꽃 정물화 20점을 완판시키며 그의 독창성을 입증했다. 무수히 많은 국내 거장들과 함께 작업을 해 온 갤러리현대가 30대 젊은 작가에게 단독 부스를 내준 것도 이례적인데, 요즘 같이 새로워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판치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흔하디 흔한 꽃 정물화로 해외 컬렉터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에 있어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성과였다.
팬으로서 가장 궁금한 것은 아직 젊은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작품세계이다. 꽃 정물화가 워낙 인기가 많으니 앞으로 계속 그릴까 아니면 다른 소재를 찾게 될까. 갤러리현대 측에 따르면 김성윤 작가는 “미술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삼고 특정 시대의 대가의 회화 작업을 본인의 창작 시발점으로 삼아 회화를 탐구한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꽃 정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변형과 변화, 배우는 과정이 매일 있었다”며 “무엇을 그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관점의 문제”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를 미루어 짐작컨데 그에게 중요한 것은 꽃이라는 소재나 주제보다는 회화의 기술적 측면과 재현 방식, 미술사적 레퍼런스에 근거한 기법의 다양성에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 주제는 신과 종교가 될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양한 미술사적 기법을 실험하고 있는 그가 종교화의 재현을 넘어 동시대적으로 어떻게 표현해낼지 기대가 된다.
그가 앞으로 선보일 변화가 기대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그의 꽃 정물화를 좀 더 보고 싶다. 이 정도 인기를 얻었으면 다작하며 마구 쏟아낼 법도 한데 생각보다 많이 그려내질 않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본 김성윤 작가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2020년작 <달항아리에 담긴 분홍꽃>이다. 2021년 석파정 서울미술관 신소장품전에서 보게 된 이 작품은 2020년 <갤러리현대 50주년 기념전>에서 출품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울미술관에서 사들인 것 같다. 꽃은 달항아리의 넉넉함을 반영하듯 시든 송이 하나 없이 풍성하게 꽂혀있고 항아리의 은은한 질감은 눈으로 만져질 듯 하다. 바니타스를 연상시키던 2019년 꽃 정물화 이후로 한 작품 정도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담고 싶었을까.
예술의 역할 중 하나는 인생의 비극을 아름답게
이겨내는 것, 그 비애의 미를 담는 것이라 생각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