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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은 Jul 27. 2022

내가 아픈 건 엄마 탓이 아니야. 엄마 잘못이 아니야.

엄마,내가 만약 딸을 낳으면 딸도 나처럼 엄마 탓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며칠 전 남편이 3박 4일 타지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나는 이 기회에 친구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계획을 세웠다. 3일이나 혼자 집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부모님께서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 출장 2일차가 되던 날 아빠 가게 갑작스레 전화가 걸려왔다. 퇴근 후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든 탓에 잠결에 전화를 받았고, 나는 서둘러 거짓말을 하지도 못한 채 사실대로 말을 해야 했다. 아빠는 퇴근하고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이 든 나를 나무라셨고 얼른 밥을 챙겨 먹고 쉬라고 타이르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아빠와 통화가 끝나고 바로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이 출장 갈 동안 친정에 와서 지내지 왜 집에를 오지 않고 혼자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으실 것 같아서 차마 전화를 받을 용기가 없어 받지 못했다. 뒤늦게 저녁을 챙겨 먹고 막 과일을 챙겨 먹을 찰나에 아빠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너 이야기만 꺼내려고 하면 울먹울먹해."


"그래? 엄마가 내 앞에서는 티는 잘 안 내시던데..?"


"네가 걱정할까 봐. 너 앞에서는 잘 티를 내지 않나 보다.

 너도 건강이 안 좋아서 힘들겠지만 지금 엄마가 갱년기도 있는데, 건강도 안 좋으니 엄마 좀 이해해 줘."


엄마가 내 앞에서는 잘 내색하지 않으시지만 내 이야기만 꺼내려고 하면 울먹울먹하신다고 하셨다. 서울에서 밥도 잘 못 챙겨 먹고 그래서 내가 아픈 게 아닌지 걱정하신다고 하셨다. 내가 아픈 게 엄마 탓인 것만 같다고.. 본인 탓인 것만 같다고 자책을 하신다고 하셨다.




힘들고 각박했던 서울 타지 생활 1년 차부터 나는 많은 혼란을 겪었었다. 이게 내가 꿈꾸던 미래가 맞을까? 여러 번 생각했었다. 힘을 때 기댈 곳이 필요했다. 나는 그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번 위기가 있었다. 고된 업무에 나와 잘 맞지 않는 일도 힘들었지만 외로운 타향살이가 힘들었던 것 같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 시기에 조금이라도 글을 쓰면서 내 취미생활을 하면서 좀 더 이겨냈다면 지금이랑은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나는 그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때는 버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러 번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매우 완강하게 반대를 하셨다.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야.'


'지금은 사회 초년생이라 힘든 거야.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더 버텨봐.'


'지금 내려오면 후회해. 지금까지 해놓은 게 아깝지도 않아?'


그렇게 사회 초년생이니까 힘든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롭게 발령받은 곳에서 실장은 처음부터 나를 견제했고, 미워했다. 모든 직원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학연, 지연으로 부류를 나누며 내가 사는 동네를 무시했다. 모든 직원이 있는 앞에서 나는 지방 출신이라고 말하며, 본인은 스세권에 산다며 자랑을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학연, 지연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많은 소외감이 들었다. 내가 지금처럼 정신이 온전하고 건강한 상태였다면, 이런 시비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 화살이 크게 날아와 내게 비수처럼 꽂혔다.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무시하진 않을까?'


'내가 방금 한 말을 듣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내가 왜 이러지? 나도 이상하리만큼 자존감이 떨어지고, 나약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인 기피증처럼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문득 자려고 누워 천장을 보는데,


'나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지? 너 왜 이렇게 살아? 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매일 듬뿍듬뿍 사랑을 담아주어도 모자랄 판에 나는 나 자신을 매일 채찍질하며 미워하고 있었다. 나를 비난하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가만히 당하기만 하고, 이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미워했다. 그렇게 나 자신을 괴롭혔던 탓일까? 몸에서 이상 신호가 찾아왔다.  그 후 병을 발견하고 나는 큰 수술을 해야 했다.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그 직장이 힘들었으면 그곳만 퇴사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마도 서울 생활에 조금 지쳐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서울에서 힘들게 타지 생활을 할 때 혼자서 밥도 제대로 차려 먹지 못하고 그때 건강을 망친 것 같다고. 힘들다고 고향에 내려가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 내 말을 들어주었다면 내가 이렇게 아프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를 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때까지도 부모에게 제대로 된 독립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퇴사는 내가 결정할 문제이지 부모의 허락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퇴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독립을 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렇게 혹독한 20대를 겪으면서 나는 많이 달라졌다. 유리 멘탈이던 내가, 조금은 단단해질 수 있었다. 독립심을 기를 수 있었다.  내가 아마 타지 생활을 하지 않고 계속 엄마와 함께 살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통제 속에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 있다. 아무리 고된 하루를 보내고 와도,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저녁을 먹고 나면 그 힘듦이 다 잊혔다. 5년간의 서울 생활을 끝내고 3년간 고향 생활을 하면서 여기서의 삶이 서울보다는 훨씬 좋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곁에 있어야 안정을 취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엄마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통제받는 생활이 싫어서, 통금 시간을 지켜야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해야 했던 생활이 답답해서 고향을 벗어났지만, 나는 엄마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의 나의 서울 생활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값진 경험이었다. 아마 고향에만 있었다면 이 소중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비록 그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나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쉽게 무너지고, 약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건강한 멘탈을 가진 엄마가 되고 싶다. 그렇기에 나의 지난 시간들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


예전부터 엄마가 되는 일은 당연한 순리라고 생각했었다.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그런데, 항인지질항체가 양성이고, RO항체가 양성이라서 유산 확률이 높을 수 있고 임신 중에 몸 상태가 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정말 목놓아 울며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남들에게는 무덤덤하게 최대한 가볍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아이는 꼭 낳을 생각이야?'


'요즘은 아이를 안 낳는 부모들도 많잖아.'


출산이 의무는 아니기에 아마도 악의없는 선택에 관한 이야기였겠지만 내 건강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아직은 솔직히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건강한 엄마가 되어 건강한 아이를 잘 출산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보려고 한다.



여자아이를 출산할 경우,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10% 정도 된다고 한다.

내가 만약 딸을 낳으면 딸도 나처럼 엄마 탓을 하지 않아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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