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조증상 후 대발작으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2시간 간격으로 약을 먹는 일 또한 습관이 되어 이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어김없이 찾아오는 성가신 녀석 덕분에 나는 좀 더 침대와 가깝게 지내야 했다.
뇌전증의 증상은 다양한데 다행히도 전조증상이 나타나기에 그 후에 오는 발작을 어느 정도 대비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내 경우에는 멍한 기분이 들면서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곤 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 나오는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가기 위해서 장롱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전조 증상은 그 장롱 속을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사실 발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에게 있어 전조증상은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행복한 기분이 들때가 많다.
그러나 찰나와 같은 순간은 사라지고 이내 가쁜 호흡과 몸 어느 한쪽이 마비가 되는 증상이 나타난다.
한쪽 뇌에서는 총을 겨누면서 내 몸을 조종하고 반대편 뇌는 계속해서 엄호를 하며 몸을 방어해야 한다고신호를 보내면서 내 머릿속은 내전이 일어난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이내 나는 멀쩡한 상태로 돌아오지만 전쟁은 늘 두려운 존재이다.
끝나지 않는 내전을 중재시키기 위해 약의 용량이 늘어가고 있지만 그 덕에 휴전 중이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다양한 이유로 내전에 참여한 병사와 같다.
어떤 이는 나와 같은 병마와 싸우는 병사이고 또 어떤 이는 삶의 시련과 싸우는 병사이며 또 어떤 이는 이별과 싸우는 병사일 수가 있다. 그러나 죽을 만큼 힘든 전쟁에서도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는 바로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전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은 전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들은 각자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만의 전략을 짜고 그것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맞는 전략은 어떻게 짜면 좋을까?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 필요할까?
각각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전쟁들은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힘들고 무서운 전쟁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전쟁터로 들어가지 않은 한 타인에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즉 내가 겪고 있는 전쟁을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타인이라고 남의 아픔을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나 또한 뇌전증을 겪기 전에는 주위에서 여러 가지 병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다. 무관심. 그것이 승전의 비결이라 볼 수 있겠다.
자신이 병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병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이별을 겪는 사람이라면 이 또한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인생의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이 시련이 행복의 씨앗이 되어 큰 행복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그렇기에 내가 가진 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일상을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들에 있어서 타인의 시선이 되어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평화롭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나는 적을 이길 수 있는 답을 쥐고 있기에 두려움과 위협이 없는 휴전을 만끽할 것이다.